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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Dec 31. 2019

아무 생각이 없다

태국 아유타야 역사공원(Ayutthaya Historical Park)

역사는 항상 글자나 표로 누워 있었다. ‘삶’이었던 게 분명한데 입체감 제로. 심지어 순서를 따져가며 줄줄 외우라는 강요까지 붙어있었다. 억지로 연표를 외우던 아이는 성인이 되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안녕을 외쳤다. 자연스럽게 남의 나라 과거에 대해서는 더 무관심한 채로 나이를 먹어갔다.



아유타야 역사공원

방콕 외곽에 있는 아유타야(Ayutthaya)는 해당 지역에 세워진 옛 왕조의 이름과 같다. 14세기 시작된 왕조의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아유타야 역사공원(Ayutthaya Historical Park)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18세기 버마의 침략으로 파괴되기 전까지 번성했던 도시답게 규모가 꽤 크다. 또한 공원 내 사원 간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서 도보로 둘러보기에는 부담스럽다. 고온다습한 기후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방콕 여행을 검색하다 보면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혹할 만한 상품을 발견하게 된다. 방콕에서 반나절만에 다녀올 수 있는 코스에, 운전기사와 차량이 포함된 아유타야 일일투어. 중간중간 원하는 사원 앞에 내려주고 일정 시간 뒤에 데리러 오는 형태로 운영된다. 편하게, 넓은 공원 중 원하는 곳을 골라볼 수 있는 데다 가격도 나쁘지 않다. 심지어 약간의 추가금을 지불하면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직행할 수 있다니, 방콕에서 밤 비행기를 탈 사람에게는 더 매력적이다. 나의 지갑도 그렇게 열렸다.



화려한 외관이 좋았던 시절의 상징이라면 불에 그을린 자국은 끝의 상징이다. 일부는 도금까지 되어있었지만 강탈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대한 불상과 섬뜩하게 파손된 불상이 곳곳에 있다. 이런저런 사연이 담겨있을 것이 분명한데 아무 생각이 없는 나는 더위와 싸우며 이따금 감탄사를 내뱉곤 했다.



경력이 풍부한 기사님은 시간을 나눠 몇 개의 사원 앞에 내려주셨다. 우린 느린 걸음으로 적당히 어정거린 후 주차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구글에서 사진이 가장 많이 나올 것 같은 곳에서는 나 역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몇 번의 복원을 거쳤지만 온전히 살려내지 못한, 사원에서 제일 유명한 부처님의 얼굴.


머리가 잘린 동상은 다른 데서도 본 적이 있지만 머리만 있는 부처님은 처음이다. 보통 사람의 시선보다 낮은 곳에, 그것도 보리수나무 사이에 갇혀있는 부처님이란. 신성한 무엇이 아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지만 부처님의 알 수 없는 표정은 더 인상적이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입체적인 역사다.

아유타야 왓 마하탓(Wat Mahathat)



어릴 때 긴 거부감 때문인지 역사와 관련한 장소를 선뜻 택하진 않는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은 짜릿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으니까 가끔 겪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볍게 스쳐가면 뭐 어때. 그건 또 그것대로  여행의 일부. 거창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거나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면 행복의 문이 더 자주 열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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