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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꺽정 Aug 07. 2018

경제학의 오류

6. 소득의 흐름

경제학을 공부할 때 가장 공감이 잘 안 되었던 것이 소득의 흐름이었던 것 같다.  뭔가 억지로 끼워 맞춘 이론 같다는 것이 소득이론의 첫인상이었다.  경제학공부의 앞부분이 ‘소득의 흐름’인데 이 부분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고 공감이 되지 않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먼가 잘 몰라서 그런 거겠지’ 생각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서서히 이해가 가겠지 했지만 시간이 흘러가도 이 이론을 다시 생각하고 또 한번 생각해도 공감이 가지 않는 상태는 여전하였다.  결국은 이해를 못하는 이 상황을 나의 나쁜 머리탓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소득의 흐름’ 이론을 바탕으로 경제학의 이론이 쭉 전개되니 이해를 하고 공감이 하느냐 여부를 떠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옳다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이 종교도 아닌데 무조건 믿고 사작해야 했다. 나의 경제학공부의 출발은 순탄하지 않은 셈이었다. 


‘소득의 흐름’ 이론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경제에는 3개의 경제 주체가 있다. 그것은 가계, 기업, 정부이다. 가계는 기업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다.  가계는 받은 임금에서 정부에 세금을 내고 소비지출을 한 다음 나머지를 저축(저축은 형태는 타인에 대한 대여/지분투자)한다.  기업은 가계로부터 자본(차입 또는 지분투자)과 노동력을 제공받아 재화/서비스를 생산하고 이것을 가계나 정부에 판매한다.  이로부터 얻은 수입으로 타인자본에 대한 대가(=이자)를 지불하고 정부에 세금을 내고 주주(가계)에게 배당한다.  정부는 가계와 기업에서 받은 세금을 국가운영에 사용하게 되고 이는 다시 가계와 기업으로 자금이 흘러간다.  이것이 소득의 흐름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나름 완벽하게 자본주의 경제가 흘러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 같아 자본주의 경제이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이 이론의 허점은 전체 가계소득의 총합을 소득으로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전체 가계소득의 합계는 극빈층의 소득과 수천억을 버는 고소득자의 소득을 단순합계한 것이다.  즉 GDP, GNP의 개념을 사용한다.  또는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평균소득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것은 GDP를 국민의 숫자로 나눈 평균의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불이라고 한다면 4인가족기준으로 연소득이 1억2천만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4인가족이 1억2천만원 버는 가계가 얼마나 되는가?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개념이 참 말도 안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100명의 국민이 있다면 그중 99명이 매년 2천만원씩 소득을 올리고 나머지 1명이 100억원의 소득을 올린다고 하자.  이들의 1인당 국민소득은 1억2천만원이다.  이 의미는 국민 1인이 1억2천만원을 번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균이 그렇다는 것이다.  국민의 99%가 평균아래 저 밑바닥수준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데 말이다.  1인당 국민소득만 보고 판단할 일 이 아닌 것이다.  


소수의 고소득자가 전체국민소득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면 소득의 흐름이 겉으로 보기에 원활하게 돌아간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소수의 고소득자에게는 의미가 있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그 소득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있다면 그 이론이 보편성을 가진 경제이론으로 인정될 수 있는 없는 것이다.  경영학의 이론으로는 인정될 수 있어도 경제학의 이론으로 구분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점이 내가 소득의 흐름이론을 공부할 때 왠지 공감이 되지 않았던 부분이었을 것이다.  


소득의 흐름이론이 경제학의 이론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의 소득수준은 편차가 크지않는 범위내에서 평균근처에 분포(이하 이 상태를 ‘균질’하다고 표현하겠다)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소득이 평균과 100% 동일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소득의 흐름 이론이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총량적인 소득이 아닌 또는 평균 소득이 아닌 균질한 소득이 각 경제주체 사이를 물 흐르듯이 막힘 없이 자유롭게 흘러 다녀야 한다.  각 구성원의 소득이 균질 하다면 자동으로 소득의 흐름은 원활해지고 경제는 건강해진다.  반대로 소득이 소수에게 편중된다면 소득의 흐름은 정지하거나 느려지게 된다.   이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이런 것이다.  피는 동맥이나 정맥에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모세혈관까지 촘촘하게 흘러야만 몸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건강한 것이다.  혈액이 큰 혈관만 흐르고 실핏줄에는 피가 흐르지 않으면 시력을 잃게 되고 몸은 썩어들어갈 수 밖에 없다.  결국은 건강을 잃게 되고 사망에 이르게 된다.  경제내에서 소득이라는 혈액의 흐름도 인간의 몸에서의 혈액의 흐름과 다르지 않다.  소득이 흐름이 느려지고 막히면 경제는 건강함을 잃고 결국은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체제하에서 구성원의 소득이 균질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  상위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소수의 부의 독점화는 더욱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의 쏠림현상은 왜 발생할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의 가치에 비하여 현저하게 적은 임금을 받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들이 초과이익을 가져간다는 것이고 그 초과이득을 기업을 소유한 가계(주주)가 최종적으로 가져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제대로 임금을 보상받지 못한 노동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계수지는 악화될 것이고 종국에는 다수의 가계는 파산에 직면할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 사실상 노동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 가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산업화가 고도화 되고 인공지능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과거에 사람이 하던 있을 자본이 하고 있다.  자동화 설비가 사람을 대신하고 있다.  과거에 100사람이 할 수 있었던 일을 지금은 1사람이 하고 있다.  인력집약적인 산업은 갈수록 줄고 있고 산업은 갈수록 자본집약적으로 변해 가고 있다.  인공지능이 대중화 되면 사람의 노동력은 그 가치가 0에 가깝게 될 것이다.  이 의미는 인간의 존재가치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소득은 계속하여 늘어나지만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소득이 계속 줄 수 밖에 없다.  일할 자리가 계속 줄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이렇게 흘러간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나의 꿈을 실현해주는 경우보다는 자본이 없는 나를 착취하여 자본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막는 역할은 정부에게 주어진다.  조세와 정부지출이 이 기능을 수행하는 핵심이다.  조세와 정부지출을 통하여 정부는 고소득자의 소득을 저소득자에게 이전을 하여 소득의 불평등을 해소한다.  이 정부의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으면 소득의 흐름이 망가지게 시작하고 결국 경제자체가 망가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 현상을 그대로 방치하면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정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조세와 정부지출은 단순히 국가운영에 필요한 돈을 걷는다는 필요한 곳에 사용한다는 단순한 개념이 아닌 사회안정화를 꾀하여 국가체제를 지속가능성을 제고한다는 개념하에 운용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할 일은 열심히 일하며 소득을 많이 올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과연 정부라는 조직이 세금을 평등하게 매기고 있는지, 그렇게 각출한 세금을 소득재분배를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이 일은 소득이 많은 사람이건 적은 사람이든 구분이 없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모두가 나서야 한다. 이러한 세입세출을 승인하는 기관이 국회이다.  국회가 그 권한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사회시스템은 공정하게 운영되기보다는 소수의 지배층이나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운영되는 경향이 크다.  법을 만드는 계층과 이를 시행하는 계층이 모두 가진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갈수록 이러한 흐름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조세제도를 하나 예를 들어보자.  정부는 2014년부터 소득공제되던 항목을 세액공제로 바뀌어 버렸다.  목적은 중위권이상의 임금소득자로부터의 세금을 늘리기 위해서이다.  임금소득자들은 대부분 사회적약자에 속한다.  현금을 창출하는 자산이 없어서 자신의 노동력만이 소득을 얻는 유일한 원천인 사람들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하는 쪽으로 세법이 바뀌어도 직장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항의할 시간조차도 없다.  시간을 내서 항의를 한다는 것도 부담이 된다.  고용주에게 찍히면 해고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세금을 올리는 것은 정부입장에서는 매우 손쉬운 일이다.   


반면에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제대로 물리지 못하고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요즘 대한민국의 주택임대차시장은 예전에 주류를 이루었던 전세에서 월세로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전세가 주류였을 적에도 임대소득에 대하여 과세하는데 소극적이었지만 월세로 바뀐 이후에도 이 추세는 바뀌지 않고 있다.  그들이 왜 임대차소득에 과세하는데 소극적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답한다. ‘임대차소득 내역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력이 부족하다’.  우리가 보기에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과세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과세를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방법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동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하러 온 세입자에게 임대차계약서를 제시받아 그 내역을 전산등록만 하면 과세를 위한 준비는 바로 완료된다.  나머지는 국세청 컴퓨터가 합산만 하면 별다른 노력이 없이도 쉽게 과세자료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하지 않는다.  정부와 국회가 가진 자의 편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국민연금의 예를 들어보자. 국민연금은 내가 불입한 만큼 나중에 연금으로 받는 제도가 아니다.  소득이 높은 사람은 많이 내야하고 소득이 적은 사람은 적게 내지만.  나중에 받는 금액은 소득이 높은 사람은 낸 금액보다 적게 받고 소득이 적은 사람은 많이 받도록 설계되어 있다.   조세와 비슷한 징수 및 분배 시스템인 것이다.  국민연금은 조세제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연금이라는 이름의 조세제도이다.  하지만 좋다.  백번 양보해서 제도 취지는 나쁘지 않으니까, 우리는 다같이 구성원끼리 도와주면서 살아야 좋은 거니까 동참하자는 마음이 대부분 우리 국민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정부와 국회는 여기에도 꼼수를 만들어 놨다.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금액은 ‘기준소득월액*9%’ 산식으로 계산된다.  언뜻 보면 소득이 많으면 많을수록 보험료를 많이 납부해야 하는 산식이지만 정부는 기준소득월액에 캡을 씌워놨다.  ‘소득이 389만원을 초과하여 신고되는 경우에는 389만원을 기준소득월액으로 한다’라고 법제화한 것이다. 이는 월 소득이 1천만원이건 1억원이건 상관없이 내는 보험료는 389만원을 번다고 가정하고 계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험료체계는 저소득자에게는 소득대비 더 많은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고 고소득자는 소득대비 미미한 금액을 보험료로 내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형평성에 어긋난 잘못된 제도이지만 이 제도를 만들고 법으로 만든 곳은 정부와 국회이다.  


이렇게 거두어진 세금은 어떻게 쓰일까?  세금은 여러 분야에 사용된다. 국방, 행정유지, 교육, 치안, 외교, 사회간접자본 확보 등 국가운영을 위한 기본적인 업무에 세금이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나서 세금은 소득재분배를 최우선 목표로 두고 지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득불평등을 치유하지 않으면 체제불안정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체제불안정은 가진 자에게도 가난한자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사안이다.  


하지만 정부지출내용을 보면 소득불평등을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키는 쪽으로 움직인다.  4대강사업은 일부 대통령과 관계가 있는 건설업자의 배를 불려주는데 사용된 전형적인 예이다.  평창올림픽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역시 지배층과 결탁한 자본가들이다.  올림픽개최에 필요한 시설(도로 및 경기장)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역시 세금이 투입된다.  그 돈은 국민이 낸 거고 그것을 가져가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열성적일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막아야 한다.  올림픽이 유치되면 국위선양되고 강원도의 이미지가 높아지고, 관광수입이 늘어나니 좋은거 아니냐 하는데 물론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자기주머니에서 각출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올림픽이라는 이벤트를 이용하여 정치가, 자본가 등이 자기잇속을 실하게 챙겨나가고 난 후 남는 것은 국민 개개인들이 세금으로 갚아야 할 빚뿐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대통령선거에 등장하는 주요공약중의 하나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경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대통령선거에 나서는 사람도 없다.  국회의원 선거도 마찬가지다.  

경제를 살린다는 의미는 국민소득을 올린다는 얘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1인당 국민소득을 올린다는 것이고 좀더 깊이 들어가면 1인당 국민소득이 한쪽을 쏠림이 없이 골고루 올려야 한다.  예를 들어 1인당 평균국민소득이 2만불에서 3만불로 올랐는데 1만불을 상위 10%가 가져가고 나머지 90%는 그대로라고 한다면 제대로 된 국민소득 증대라고 할 수 없다.  


소득의 흐름이론이 시사하는 바는 이거다.  소득이 구성원들에게 균질하게 분포되면 경제는 건강하게 순환되지만, 소득이 소수에게 편중되기 시작하면 경제는 서서히 망가져 고소득자나 저소득자나 모두가 패배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모두가 승리자가 되도록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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