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사는 우리는 정신 없이 살아가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의 삶은 매우 치열하다. 불필요할 정도로 그 강도가 세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환경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몇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곤 한다. 이렇게 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인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해내야 하는 것이 있는가? 등등
우리나라에서의 삶이 힘든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국토면적이 인구에 비하여 크지 않다. 그리고 천연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근대화전까지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아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농지가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산되어 소유되고 있었다면 이러한 상황은 개선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농지는 대지주들이 대부분 소유하고 있는 구조였기에 상황을 더 악화시켰을 것이다.
근대화를 통하여 섬유산업을 발전시키고 중공업을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은 농업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덕분에 국민들은 예전처럼 굶어 죽는 사람들은 사라졌고 국민소득도 향상되었지만 부의 소유구조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대지주밑에서 소작하던 농민들은 사라졌지만 이들이 도시의 공장으로 자리를 옮겨 과도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것은 예전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절대적인 가난은 벗어났지만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상대적인 가난의 정도는 더 심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업은 내수중심이 아닌 수출지향적인 경제이다. 자원을 수입하여 노동력 지식을 이용하여 공업제품을 생산하여 해외에 수출하여 살아가는 나라인 것이다. 해외시장에서 경쟁이 심해질수록, 세계경제가 안 좋아질수록, 중국처럼 우리가 주력으로 하는 산업을 빠르게 따라잡는 경우, 우리경제는 힘들어 진다.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남들보다 더 일하고 더 능력을 높여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이러한 점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수출이 잘 돼서 돈을 많이 벌어들일 때는 나눌 파이가 커지겠지만 세계경기가 좋지 않을 경우 나눌 파이가 작아진다. 작아진 파이를 나누는 작업은 고통스럽다. 나눌 파이가 많든 적든간에 각자는 보다 많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하는데, 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보다 좋은 사회적 우위를 점해야 한다. 사회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과 같이 어려서부터 무한경쟁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겠지만 우리나라만큼 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 보다 ‘이렇게 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가?나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심각할 수밖에 없다. 자살율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불명예도 이에 기인한다. 지긋지긋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특히 심각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정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의 존재이유는 무엇이고 왜 태어나고 왜 살아가는가?’ ‘우리에게는 신적인 존재로부터 받은 소명이 있는가?’
보통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축하하고 우리 부부에게 내려진 특별한 선물로 생각한다. 그 아기를 애기중지하고 무탈하게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것은 본능이다. 그런 본능이라는 것이 어떤 작용으로 생겨났는지, 그것이 가치가 있는 작용인지는 미스터리이다. 어쩌든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명의 탄생 그리고 그 이후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특별하고 의미가 깃든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지구상에는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가 있는가 하면 메뚜기나 파리와 같은 생명체가 있고 바다에는 물고기 같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생명체들이 지구상에서 살고 있다.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로서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형태는 다르고 먹고 사는 방식과 진화의 방향은 다르지만 다양한 생명체들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새끼를 낳는 번식행위를 통하여 태어나고 번식행위를 한 다음에 생명을 다하면 소멸한다. 새로운 새끼는 부모가 했던 것처럼 똑 같은 과정을 걷는다. 이러한 과정이 모든 생명체에서 무한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인간도 이러한 무한반복의 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생명체는 동일한 것이다. 왜 이런 과정이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있는지 아직까지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를 본능적인 행위라고 하는데 이 본능이 왜 이러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안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우리는 아메바가 태어나고 번식하고 소멸하고 아메바2세가 다시 번식하고 소멸하는 과정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다고,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파리가 태어나고 번식하고 태어나고 소멸하고 번식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파리의 존재의 이유나 소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과 같은 다양한 생명체와 똑같은 과정을 걷지만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게 높은 지능을 바탕으로 문명을 이루어낸 인간에게는 특별한 존재의 이유, 태어난 고유한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컴퓨터를 만들어 사용하고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고 화성에 사람들 보내고, 사이보그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아이큐가 높다고 다른 사람보다 신체적인 능력이 좋다고 내가 특별하게 태어난 존재이거나 신의 소명을 받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고 그렇게 된 거고 유전자의 조합에 의한 우연의 일치, 확률상의 가능성이 발생한 것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태어났다고 해서 소멸을 피할 수 없고 나의 다르게 보이는 특성이 나의 자손에게 그대로 전해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아인쉬타인의 자녀가 아인쉬타인은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내가 태어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어쩌다 보니 태어난 것이다. 사는 이유는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이고 생명이 내용연수를 다하면, 본능적으로 원하지 않지만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본능의 명령에 의한 결과물이고 본능의 명령은 인간과 것과 아메바의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없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우수해 보이는 개체별 차이점은 유전자조합에 따른 확률적인 발생일 따름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환경변화에 따라 종의 유지를 위한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우리 유전자는 앞으로 어떤 환경변화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다양한 유전자 조합을 통한 다양한 특성을 가진 개체를 생산해 낸다. 따라서 어떤 개체는 주어진 환경에 최적인 경우가 있고 그렇치 않은 개체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환경이 바뀌면 이전에 우위의 특성은 열위의 특성으로 되어버릴 수가 있다. 높은 지능은 언제나 우위의 특성이지만 바다에서 태어난다면 수영을 잘 하는 특성이 지능보다 우선할 수 있다. 바다에서 수영을 잘 못하면 지능이 낮은 개체보다 잡혀먹히거나 익사하여 소멸할 가능성이 높다. .
지금 현재의 상황에 부합하는 유전자 조합으로 태어난 경우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너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이었다면 당신이 가진 (지금은 인정받지 못하는) 특성이 우위의 특성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이유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지금 주어진 환경에 내가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하여 고민할 필요도 없다. 재수가 없었을 뿐이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니고 나의 잘못으로 그리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어진대로 살아가다가 명을 다하면 그것으로 순리에 따르는 것이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이러한 생각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균형이 이루어지는 야생의 세계에 적합한 생각이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다소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법과 제도가 있다. 이 법과 제도를 만들고 이를 규율하는 것은 인간들 중 일부인 기득층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하여 상속이란 제도를 만들어 내고 신분제 등등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인위적인 규율은 자연스러운 경쟁을 통한 균형을 방해하고 능력있는 자의 기회를 박탈하고 계층간 불평등을 지속시킨다. 따라서 인간의 세계에서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내버려 두면 균형이 유지되지 않고 항상 불균형 상태가 지속된다.
소규모집단이든 대규모집단이든 일부세력이 그 집단의 헤게모니를 쥐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집단의 시스템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꾸려 한다. 그래야만 우연이 쥐게 된 그 헤게모니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안을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경찰을 만들고 체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만든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하는 실제 목적은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법과 제도도 새로 만들거나 변경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기득권을 쥔 그들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리하게 그래서 다른 세력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함부로 넘겨보지 못하게 하고 넘겨볼 때 혹독한 형벌을 가한다.
이러한 것은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지만 조선시대의 사회구조를 살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군대가 있었기에 다른 세력들은 함부로 준동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경국대전 등 법을 만들어 통치체계를 만들고 유학을 통치이념을 삼아 제도를 정비하였다. 왕족과 사대부는 이를 바탕으로 삼아 지배층이 되었고 그외 다른 이들은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 노비로 만들어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번 지배층은 영원한 지배층이었고 한번 소작농은 영원한 소작농, 한번 노비는 그 자식들도 노비, 한번 백정이면 대대손손 백정이었다. 신분간 이동은 절대로 발생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야만 그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대대손손 유지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리되면 당연히 계층간 불평등이 생겨나고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의 소요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들은 농민 노비들이 준동하는 상황을 막기 위하여 전국 곳곳에 포도청을 두어 그 지역을 통제하게끔 하였다. 조선의 군대가 군대의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있는지? 그보다는 지배층의 기득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되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지배층은 조선의 군대를 일본군대와 함께 동학혁명군을 무참하게 살해 진압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나마 임진왜란시 이순신장군이 조선의 군대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때 지배층은 이순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조선의 지배층은 이순신을 잠재적 역모세력을 보고 이순신을 제거하려고 했다. 왜군에게 나라를 뺏기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 우선시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왕권의 시대는 지나가고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주의체제로 변하게 되었는데 이는 민중봉기를 통한 민초들의 피의 댓가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불평등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는 것은 필연이지만 그 불평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고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산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일면 무자비해 보이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순간순간 발생하는 불균형이 바로바로 해소되고 균형을 찾아가는 반면 인간의 세계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왕권의 시대는 지나가고 민주주의가 주류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지만, 불균형을 만들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그 방법이 정교해지고 은밀해지고 있다.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편리한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으로 인해 우리는 전례없이 매우 통제된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에 의한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계급제는 사라진 듯 하지만 자본에 의해 구분되는 새로운 계급이 생겨났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야생의 세계와 같이 불균형이 자연스럽게 치유되지가 않는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기득권층이 인위적으로 균형 회복을 방해하고 불평등을 고착화 하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사회에서는 기득권층의 이러한 행위를 감시하고 척결해야 하는 특별한 투쟁이 있어야만 사회가 균형점을 찾을 수가 있다. 자연의 법칙으로는 절대로 균형을 찾을 수가 없다. 법과 제도는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로 수립되지 않도록, 모든 이에게 기회 평등이 보장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하여 다수의 대중은 기득권이 지금 가지고 있는 힘으로 이러한 불균형을 만들지 못하도록 협력 결사 투쟁을 해야 한다. 과거에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음에도 이러한 피를 앞으로도 계속 흘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노력이 꾸준하게 이루어질 때 흘려야 하는 피의 양은 최소화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왜 살아있어야 하는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답이 될 것이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무작위이고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고 탄생의 이유도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태어난 이상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이것이 우리가 살아있을 이유이고 존재하는 명분이 될 것이다. 신이 우리에게 내린 유일한 소명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