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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빛 Apr 08. 2021

타협의 가치

현실과 이상을 맞춰 나가는 삶은 무가치한 것일까

처음 배치된 팀에서 일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때였나, 이제 신입사원 티를 막 벗었을 무렵 팀원들과의 술자리에서였다. 어떤 광고주 업무가 힘든지 요즘 연애 사업이나 가족들의 근황은 어떤지 같은 보통의 회식에서 있을 법한 주제들이 오고 갔다. 모두가 적정량 이상의 알코올 기운에 잠겨 있을 무렵 부장님이 대뜸 최종 면접에서나 들을 법한 질문을 던졌다.

“너희는 각자 인생의 가치를 한 단어로 정의하면 뭐라고 답할 것 같아?”


차장님은 가족들과의 사랑을 꼽았다.

대리님은 일을 함에 있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정의를 꼽았다.

세 사람의 눈은 마지막으로 막내의 입에서 튀어나올 감동적인 마무리 멘트를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저는 타협이요.”


기대를 벗어난 어린 쇼펜하우어의 대답에 부장님은 크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이미 준비해두었을 교훈적인 말씀에 밑밥을 조금 더 충실히 보태기 위해서는 가족, 행복, 성공 같은 무난한 키워드를 꼽았어야 했지만 그러기에 나는 한창 직장 사춘기를 겪고 있던 참이었다. 말이 되지 않는 업무량에도 딱히 지친 내색을 하지 않고 줄곧 웃는 상이던 내가 즐거운 술자리에서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은 것도 뜬금없었거니와, 하필 순서도 정의로운 삶 다음에 타협하는 삶이라니 도덕성에 크게 오해를 살 만한 발언이기도 했다. 부장님은 나에게 조금 더 다른 방향에 삶의 가치를 둘 것을 에둘러 권유하며 재빠르게 긍정적인 키워드로 화제를 전환하였다.


나는 나의 대답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나의 욕심에 기대지 않고, 나의 이상적인 면모에 사로잡히지 않고, 외면하고 싶던 현실과의 거리를 좁혀왔기에 지금 이만큼의 내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타협’은 나에게 그런 단어였다. 하고 싶은 일보다 내가 뽑힐 수 있을 것 같은 회사에 지원하고, 먼 미래의 꿈보다는 당장 발 붙일 만한 돈벌이 수단을 찾고. 무언가를 포기한다고 생각했던 선택들이 모여 가족들에겐 서울에서 학교 나와 대기업 다니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고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나의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이후 딱히 기억에 남을 일 없는 술자리들을 무수히 지나 대리 직함을 달아도 일은 도무지 완벽히 적응이 되는 법이 없다. 업무는 어느 순간에는 보람 있다가도 바로 다음 날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사들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 힘에 부치다가도 귀염성 있는 막내 대접을 받는 것은 또 놓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루하루 싫은 순간들을 꼬박꼬박 들어오는 급여의 가치와 맞바꿔 타협하며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 돌아오곤 한다. 아마 지금도 똑같은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크게 달라질 리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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