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공포증 극복에 특효약인 미디어 바이어로 살아남기
나는 전화 거는 것을 제법 무서워하는 편이다. 친구와 약속 시간을 잡을 때면 누가 받을지도 모르는 집 전화로 연락을 해야만 했던 어린 시절부터 전화를 거는 일은 사전에 엄청난 마음가짐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곳은 광고대행사, 그중에서도 아마 유선 연락을 많이 하기로는 순위권에 들 법한 옥외 매체팀이었다.
미디어 바이어라는 직무는 사실 입사와 함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미디어 바이어 중에서도 특히 옥외 매체만을 전담하는 팀이 있는 곳은 국내 대행사 중에서도 손에 꼽는다. 매체 직무는 사무실에 앉아 데이터만 만질 것이란 막연한 예측은 시원하게 빗나갔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수많은 매체 중 구매하고자 하는 상품의 인벤토리와 단가를 확인하고 능청스러운 협상까지 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엄청난 교육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월급을 쥐어주는 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팀에 배치된 지 2주 정도가 지났을 때 신규 캠페인 제안을 맡아보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이번 캠페인은 매체랑 예산이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대로 확인만 하면 돼. 여기 적어준 대로 연락드려서 예산이랑 일정에 맞게 인벤토리 확인해 달라고 요청만 하면 되는 거야. 2호선 스크린도어는 A커뮤니케이션의 이 상무님, B극장 스크린광고는 C사의 김 팀장님......."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매체별로 담당 영업사원을 척척 찾아내어 주시는 대리님과 부장님의 모습이 신입의 눈에는 너무나 대단해 보였고, 집 밖에 있는 건 모두 옥외(Out-Of Home) 매체라는데 이 수많은 전광판이며 극장, 공항, 버스, 택시 등등의 판매사와 영업사원은 앞으로 대체 어떻게 알고 외워 나가야 하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겁이 났다.
처음 매체 영업사원 분께 전화를 걸 때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멍청한 신입사원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수첩에 해야 할 멘트를 일일이 적어서 연습하고 숨을 돌렸다. 내가 누구인지, 통화가 가능하신지, 어떤 업종 제안 건으로 연락드렸는지(제안이 확정되기 전까지 대부분 광고주명은 대외비로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회사 광고주 리스트를 꿰고 계시는 베테랑 영업사원 분들은 업종만 말씀드려도 어련히 눈치채신다.), 예산과 기간은 어떻게 되는지, 선호하는 상품과 위치는 어떠한지 등등을 최대한 차분하게 말씀드리고 메일로 내용을 한번 더 정리해드린다.(이 부분은 추후 옮기게 된 팀과 크게 다른 부분인데 외근이 많으신 영업사원 분들과 일하다 보니 선전화 후메일이 공식이었다.) 다행히도 새로 온 막내 사원에게 모든 분들은 과분하리만큼 친절하셨고 오히려 그 친절함에 눈이 멀어 모든 정보를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일이었다.
도움 끝에 세 가지 정도의 매체 상세 내용을 제안받아 매체 특장점과 우리가 확보한 서비스율을 녹여 첫 번째 제안서를 무사히 마무리했다. 광고주가 컨펌한 매체는 좋은 위치가 팔리기 전에 바로 청약하고 가이드에 맞게 제작 요청한 소재를 AE로부터 전달받으면 영상 파일은 심의 접수, 출력용 이미지 파일은 제작사에 넘겨 교정지 확인 후 수량에 맞게 최종 출력을 요청한다.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업무였지만 너무나 복잡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영화 상영관에서나 출퇴근길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내가 구매한 스팟에 광고가 나올 때는 제법 보람이 큰 것이었다.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것이라 예견했던 전화 거는 일은 불과 몇 달 후, 복수의 캠페인들을 동시에 담당하며 하루에 60통씩 통화 이력이 쌓이고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와중에는 내선으로 전화가 오는 패턴을 반복하면서 가장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사실 내가 전화를 걸 때보다 상대방이 건 전화가 울릴 때가 훨씬 두렵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