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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빛 Mar 09. 2022

그놈의 방송국이 뭐라고

신입사원이 되어 본 신입사원 면접

과학자, 대통령, 피아니스트, 선생님..

보통의 초등학생들이 고를 만한 장래희망 란의 공백을 채울 답안 대신 나는 ‘작가’를 적어 내곤 했다. 하지만 이내 세상 물정을 깨닫게 된 후 평균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 들었고, 고정적인 벌이가 될 만한 꿈으로 옮겨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정의 내릴 순 없지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말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인지 단지 내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인지는 답이 안 나오지만, 아무튼 그 답에 가까운 곳 중 버젓이 직장이라고 할 만한 곳은 방송국밖에 없어 보였다. PMP로 인터넷 강의를 듣던 00년대 후반의 지방 여고생에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세계였다.  


신문방송학과 학부생이 된 스무 살의 나에게 뜻밖에도 그 세계는 더 멀어졌다. 첫 전공수업에서 교수님은 장래희망을 포함해 자기소개를 요청하셨다. 70여 명의 동기들은 절반은 기자, 절반은 PD를 언급했다.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재능과 비슷한 꿈을 안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혀야 넘을 수 있다는 방송국 문턱에 나는 진작 고꾸라지고 말겠단 생각이 밀려왔다.  


광고회사 신입사원이 된 스물여섯 살의 나는 현실에 가까워졌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직장 중 그나마 적성에 맞을 법한 곳에서 안정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쉬울 게 없을 만큼 월급도 마음껏 써보았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응어리 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제대로 도전이나 해봤나?' 싶던 찰나에 몇 년간 얼어 있던 방송사 공채가 떴다.  




멋지게 현장을 통솔할 자신이라곤 없던 나는 ‘편성 PD’라는 직무를 골라 잡았다. 적당히 지금 하는 일과 간극이 적으면서 파일럿 프로그램도 기획할  있는 일이었다. ‘옳다, 워라밸과 재미   잡아보자.’하고 소중한 점심시간들을 털어 제출한 자소서는 뜻밖에 합격으로 향했다. 되지 않으리라 싶으면서도 야근    카페에서 틈틈이 공부한 날들이 모여 필기시험도 극적으로 통과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회사에서 마주치는 분들과 제법 비슷한 얼굴  어른들 앞에서 1 면접을 보고 있었다.  훗날 후회하지 않기 위해 했던 작은 시도에 욕심이 붙어 나갔다.


데자뷰처럼 1차 면접에서 나를 공격했던 팀장님들은 합격을 선사했다. 2차 면접은 일정부터 곤란했다. 2주 간격으로 목요일에 연차를 내는 막내 사원은 수상쩍기 그지없었지만, 놀랍게도 지방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신다는 핑계는 백전불패였다. 왜 하필 금요일이 아니고 목요일이냐는 질문도 없었다. 대놓고 도망칠 꿍꿍이를 몰라주는 데 대한 섭섭한 마음이 이직에 대한 열망을 가중시켰다.


몸도 마음도 깡말랐던 취준생 시절에 맞추어 줄였던 정장은 너무나 타이트했다. 새벽같이 시작되는 면접 시간에 맞춰 택시를 잡아 올라타는 순간 정장 치마 뒷단이 보기 좋게 튿어졌다. 타보지도 못한 택시에 기본요금을 지불하곤 원피스 정장을 갈아입고 아침 일찍 도착한 상암에서 또다시 양주의 연수원까지 이동했다. 모두가 경쟁자인데도 놀라우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교시마다 과제가 주어지고 생각을 정리하고 전지에 내용을 적어 발표하는 과정이 그룹 연수에서의 일과와 꼭 같았다. 물론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천지 차이였지만.


마지막 토론 면접에서는 의욕을 반쯤 잃었다. 원체 공평한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데다, 빈손으로 어떻게든 이 자리를 잡겠노라 덤벼드는 경쟁자들 틈바구니에서 돋보이기는 더 어려웠다. 저녁 식사 시간이 넘어서야 합숙 면접이 끝나고, 제출했던 휴대폰 전원을 켰다. 종일 쌓여 있던 부재중 메신저며 전화 알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이 놈의 회사는 어떻게 된 게 고작 2년차 사원이 하루 비운다고 일이 안 돌아가?’

푸념할 시간도 없이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셔틀에 올라야 했다.


면접을 함께 한 조원들은 모두 맑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분명 다들 좋은 결과를 예측했기 때문이겠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본인의 직감과 합격 여부가 반드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2년 전 체감한 탓에 나는 홀로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내 직감이 맞았다. 짧은 외도를 마치고 다시 웃는 얼굴로 원래의 내 자리에 돌아왔다.




디지털 매체 업무로 옮겨 와서 늘상 하는 일은 떨어져 가는 TV 시청률을 근거 삼아 디지털 예산을 더 써주십사 제안하는 문서를 만드는 것이다. 콧대 높은 방송사의 문턱을 넘지 못한 한 사람으로서 그 콧대가 점점 낮아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의외로 마냥 통쾌하지만은 않다. 내가 바랐던 것은 모종의 성취였을까 아니면 위상 높은 직장에 취직한 내 모습이었을까.


"저희가 하는 일이 당장 내일부터 이 세상에 없어져도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

메일을 쓰다 말고 앉은자리에서 문득 사수에게 말을 던졌다. 저렇게까지 영양가 없는 질문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사수의 표정이 읽혔다.

“민경아, 그럴 시간에 쓰던 거나 마저 써.”


그래도 어쩔 도리가 있나. 나는 곧 죽어도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 중요한 사람이고, 아직 내 일이 완벽히 그 기대를 빗나가진 않은 것 같으니. 질문을 계속 던질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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