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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빛 Mar 05. 2022

님이라 부를 수 없는 그대들

수평적인 호칭 문화의 불편한 진실

입사 2년차에 직급 체계가 바뀌었다. 사원부터 부장까지 너도 나도 ‘님’으로 하나 되는 시대가 열릴 것이란 인사팀의 공지가 올랐다.

사실 사원 입장에서 직급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바이어였던 내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영업사원 분들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리님’이라고 부르기 일쑤였고, 이를 바로잡으려 해 봤자 “일 잘하면 다 대리님이죠~” 하는 너스레 정도가 따라올 뿐이었다.


얼마 후 그룹사 연수 시절 동거 동락했던 같은 조 오라버니들과 회동이 있던 날이었다. 아예 전 직원이 수평화된 우리 회사와 더불어 일부 계열사도 직급이 간소화되기 시작한 터였다. 당시 사원 2년차에 불과했던 우리는 입 모아 수평화된 호칭 문화가 외려 더 불편하다고 주장했다.

“난 사실 이 직급 체계 바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오, 어떻게요?”

“더 세분화돼야 하는 거지. ‘진급 대상자인 대리’, ‘승진 누락된 차장’ 이런 식으로 가야 실수할 일이 없다니까.”


사실 호칭에 있어 가장 눈치 봐야 하고 그만큼 지적도 많이 받는 사원들에게 FM대로 ‘누구님’을 시전 했을 때 떠안게 될 모종의 눈초리는 가장 부담이었다. ‘부장 진급해도 졸지에 누구님으로 좌천됐네’하는 식의 농담도 상위 직급자들만의 놀이 문화일 뿐이었다.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불편하기는 매한가지라, 해가 바뀌어도 옆팀에 승진 여부를 물어 물어 폐지된 직급 기준으로 환산해 자체적으로 호칭을 업데이트하기에 이르렀다.


4년차가 되면서 예전 직급 기준으로는 대리 승진이 되었다. 시스템에서는 진급 여부도 확인이 가능하고 연봉도 인상되었지만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호칭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님'이 '대리님'으로 승진했다는 사실은 팀 카톡방을 통해 공공연하게 알려졌고, 협업 부서에서도 "이제 대리님이시죠?"가 연초 인사가 되었다. 사원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그간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협력사로부터도 여지없이 '대리님'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모종의 원성들을 수렴해서인지, 그룹사 직급 체계를 통일해야 해서인지, 그래도 나름 호칭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법한 '매니저'와 '시니어'라는 구분이 생겼다. 두 직급 외에는 승진의 개념도 사라졌다. 곧이어 해가 또 한 번 바뀌었고, 기존 직급을 그대로 부르는 것도 자체 승진 누락 같은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젠 문제없다. 하늘 같은 부장님께 냅다 이름을 부르는 건 어려웠지만 '시니어님' 정도는 능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생겼다.


적어도, 지금 회사의 분위기에선 상사를 부를 만한 모종의 단어가 필요하다. 내가 영꼰대라 위계질서가 편한 건지, 문화는 바뀌지 않고 수평적인 행동을 강요당한 것이 불편한 건지 모르겠지만, 한국인의 정서에 완벽히 부합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다. 'Hey, Peter'가 '정수님, 안녕하세요'의 완벽한 번역이 될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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