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가르쳐주는 방법
언어를 터득하는 과정은 참 신기하다.
기억에도 남지 않는 어느 순간 말하는 방법을 깨우치고, 겹받침이 있는 단어를 적어내려갈 수 있게 되고, 귀로 들을 일 없던 어려운 말의 뜻도 깨우쳐 가게 된다.
뜻 몰랐던 말들과 하나 둘 인사를 해나가던 시점에 나를 가장 헷갈리게 만든 단어는 다름 아닌 ‘객관적’이었다.
낯뜨겁지만 엄마가 항상 달고 사는 표현법 때문이다.
“우리 딸은 객관적으로 봐도 너무 완벽해.”
“객관적으로 우리 딸이 제일 예쁘더라.”
“엄마는 진짜 객관적인 사람이야.”
한 글자 차이로 천지를 오가는 객관과 주관의 뜻을 헷갈리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어린이에게 너무한 처사였다.
이젠 분명히 알았다 싶은 순간이 와도 집에만 오면 이렇게나 주관적인 멘트들을 객관의 탈을 씌워 내 귀에 퍼부어대니 말짱 도루묵이 될 수밖에.
“엄마, 그건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인 거잖아! 학교에서 배웠어.”
어린 나는 좋은 소리를 들어도 입이 댓 발 나와 대꾸하기 일쑤였다.
“엄마 친구들도 다 동의했어. 너는 모르지만 어른들 눈엔 보인다니깐 그러네.”
“아니, 엄마도 참. 친구가 그렇게 얘기하는데 아니라고 할 수는 없잖아.”
엄마의 주관적인 객관적 사랑 폭격을 맞으며 자란 탓이었나. 나는 유난히 칭찬을 받아도 그 말뜻을 올곧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이 되어버렸다.
외려 시니컬해지거나 칭찬도 못 들은 척 화제들 돌리는 스킬만 늘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한쪽에서 넘치게 받는 사랑은 누군가의 마음이 멀어지거나 미움을 사는 것 같은 순간이 오더라도, 잠시 마음이 저린 구간을 넘어가면 초연해질 수 있는 완충재가 되곤 했다.
그래, 모든 사람이 나를 성에 찰만큼 사랑해줄 수는 없을 것, 어쩌면 '사랑 총량의 법칙' 같은 걸 믿는 셈이다.
취업을 하고선 짬이 나면 되도록 10년 넘게 떨어져 지내 온 가족들과 한두 밤 여행을 다녀오려 하고 있다.
양쪽 눈에 건재한 시력 1.5를 유지하면서도 근시가 와버린 엄마는 '노안은 슬픈 거야'를 외치며 내게 잘 나온 여행지 사진 몇 개를 추려달라 한다.
잠깐의 고민과 함께 내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글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사실적인 사진들이 엄마의 카카오스토리에 올라온다.
딸 찬스로 좋은 곳에 다녀왔다는 TMI와 함께.
역시 딸이 최고네요~
몇 분 뒤면 엄마의 지인들이 쓴 댓글이 하나하나 올라온다.
어쩌면 엄마의 주장이 약간은 맞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