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방법을 발견하기까지
봄꽃이 필 무렵의 사회학 수업 시간, 아마도 2013년도였을 것이다. 화사한 바깥 풍경과는 제법 어울리지 않는 사회 운동 수업을 들으러 모인 학생들과 시위 현장의 피켓 문구 수집이 취미인 낭만적인 교수 한 명이 어우러져 있는 강의실이었다. 다소 격한 연구 주제를 다루면서도 소년같은 얼굴을 간직하고 있던 교수님은 사회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기 위한 요건으로 연대를 이야기했다. 특정 집단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의제일수록 그 힘은 당연히 커진다고 말이다. 그 때는 그저 이론적인 말로만 들었었다. 절대 다수가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사회적 이슈와 연관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상실은 소중한 사람이 있는 누구나 적어도 한 번은 겪게 되는 경험이다. 무엇이든 잘 견뎌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싸여 있는 사람들은 외려 더 단단한 척하거나 혹은 너무 큰 고통을 실감하지 못해 내색을 하지 못하곤 한다. 잠깐 큰 소리로 울고 잊어버릴 수 있는 타인과 달리 며칠을 버텨내도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영화 <데몰리션>에서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아내의 죽음을 맞은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는 남겨진 자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 날 멀쩡하게 회사에 출근하는가하면, 위로를 건네는 직원을 향한 대답은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 관련 지시로 대신한다.
슬픔을 겪은 자의 올바른 모습은 무엇일까? 타인이 정의할 수 없음이 당연함에도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한다', ‘아내가 죽었으면 남편은 실의에 빠져 한동안 일은 손에 잡을 수도 없어야 한다' 등의 시선은 또 하나의 가시가 된다. 아내의 죽음 후에도 슬픔에 잠기지 않은 듯해 빈축을 샀던 그의 진짜 속내는 누구보다 크게 곪아가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슬픔을 털어놓지 못하던 그는 아내가 마지막을 맞이한 병원의 고장난 자판기 회사 고객 센터에 보상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다 속내를 털어놓고 만다.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오히려 솔직하게 써내려간 그의 감정에 동요한 고객 센터 직원 ‘캐런(나오미 왓츠)’은 ‘데이비스'가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되어준다. 마음 속에 갇힌 응어리를 풀기 위해 ‘데이비스'가 택한 방법은 분해였다. 아내가 여러 차례 수리를 부탁했지만 방치했던 물 새는 냉장고부터 시작해 함께 했던 집까지 모조리 부수고 분해해버린다.
상처를 치유해나가던 그는 아내의 묘지 앞에서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차량 운전자를 마주친다. 참회하는 그를 용서하면서 이제껏 분해되기만 했던 그의 마음은 어느 정도의 안정을 이룬다. 그리고 그 동안 참아내고 있었던 울음을 쏟아 붓는다. 아내 ‘줄리아(헤더 린드)'의 이름으로 화려한 자선 행사를 열며 장학금을 수여하고자 하는 장인에게는 정말 자신과 죽은 아내가 원한다고 생각되는 일을 요구한다. 그 결과로 그들이 살던 바닷가의 한편에는 버려질 뻔한 회전 목마가 자리해 더 많은 아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한다. 그녀가 좋아했던 것을 하나 하나 떠올리게 된 자신을 돌아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떠나보낸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토록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개인적인 경험조차 여타의 공감과 안타까움을 산다. 그 사람이 고통을 치유해나갈 수 있는 시간은 타인이 판단할 수 없다. 그 치유의 방법을 알게 되기까지 용기와 위안을 주는 수밖에 없을 뿐이다.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강의를 들었던 이듬해 봄, 전국민에게 상실감을 전이시킨 큰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그 수업에서 A+ 학점을 받았지만 현실에서는 C+짜리 시민이었다. 사적인 대화에서나 간단한 행동 외에 적극적인 의견 개진이나 큰 차원에서의 공감은 펼치지 못하는 용기 없고, 어쩌면 그렇게 커다란 크기의 상실감에 깊이 빠져들 자신이 없었을 어린 학생일 뿐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의 나도 변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나의 오늘과 나의 고통이 더 중요한 뻔한 사람밖에 되지 않지만 몇 글자로나마 마음은 보내고 싶다. 내가 경험했고 앞으로 경험할 상실의 고통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