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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suny Jul 07. 2019

Are we preprogramed? : 경쟁

우리는 어디에서 행복을 추구하는가


*이 글은 2017년 11월에 개인 Facebook에 올린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요즘은 독일어 학원에서 토론 연습을 한다. 한 번은, '학생들에게 시험은 필수적인가'에 관한 주제로 찬반토론을 했다. 나는 아무래도 시험 자체에는 긍정적인 입장인데, 어쩌다 보니 반대의견의 입장에서 토론에 참여하게 되어 말을 좀처럼 하지 못했다. 생각이 복잡해져 입을 열지 못하자, 선생님이 내게 화두를 던져 주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보고 자살을 하기도 하잖아,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아. (한국에선 학생들이 시험에 매달려 사니까), 시험은 학생들에게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자기 성적을 친구들과 비교하는 심리가 생길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엔 뭔가 앞뒤가 안 맞았다. 독일에서도 독일식 수능시험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한국에서도 시험을 보고 독일에서도 시험을 봐요. 그런데 한국에서만 그게 문제가 돼요. 즉, 시험 자체가 문제가 아니에요."

사실, 핵심은 평가 방법에 있었다. 독일에서는 수능시험 Abitur에 우리나라만큼 목숨을 걸지 않는다. 대학이 상대적으로 평준화되어 있을뿐더러, 졸업이 어렵지 입학은 비교적 쉽다. 대부분의 학생이 독일식 수능시험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는 하지만, 의대 혹은 특수학과가 아닌 이상, 무조건 최상위권의 성적을 받을 필요는 거의 없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집에서 가까운 대학교 중에서 원하는 학과가 있는 학교로 진학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절대평가 방식이다. 학교 수업을 따라갈 준비가 되었는지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목적이다. 독일식 수능인 Abitur 자체도 하루에 한 과목씩, 띄엄띄엄 시험을 보아 길게는 2,3개월이 걸린다. 시험 중 하루 정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리스크는 적다.

며칠 전엔 한국에 있는 동생이 수능시험을 치렀다. 남들 못지않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몇 개의 실수 때문에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아 많이 낙심한 것 같다. 서너 개의 실수 때문에, 대입에서 수만 명의 뒤로 순서가 밀려 안타까웠다.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경쟁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경쟁을 무의식에 주입당한다. 어릴 때부터 비교 경쟁을 통해 성적을 매기는 습관을 들여왔고, 대학교 미술수업에서도 상대평가로 성적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 비교경쟁에 목을 메는가? 그리고 실패와 실수에 왜 그렇게 인색한가? 이 기형적인 시스템이 유별나다고 느낀 건 이때부터였다. 그때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십여 년 동안 한국에서 자랐고,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남들과 나의 성취도를 비교했었다.




하루는 룸메이트가 방에서 PC게임을 하길래 놀러 가서 구경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공룡이 몇 마리 걸어 다니는데, 한참을 봐도 이게 뭐하는 게임인가 싶어서 물어보았다. "이게 뭐하는 게임이야?"

"얘네가 다 내 공룡이야. 익룡을 타면 날아다닐 수도 있고, 다른 공룡으로는 식량 채집을 더 빨리할 수 있어."

세상에, 공룡키우기라니.


“아하.. 그러면, 이 공룡들로 나중에 다른 플레이어랑 싸우거나 하는 거야?”


“아니..? 그냥 키우는 거야.”


룸메이트가 했던 게임은 순수히 공룡키우기 게임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주로 축구게임을 했고, 지금까지 게임을 즐겨하는 친구들도 대부분 경기의 승리와 패배가 나뉘는 전략게임이나 FPS게임을 즐겨한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내게 ‘게임’이란 개념은 당연히,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승패가 없는 게임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달까. 그래서, ‘어떻게든 승패가 나뉘는 경합을 하냐’는 내 질문에 내 잠재의식이 적나라하게 조명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행복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꼈던 반면, 그 룸메이트는 자신의 공룡을 키우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꼈던 것뿐이다. 사회와 문화가,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원천까지 결정짓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었다.




심해지는 양극화 때문에 표준분포라는 단어의 의미가 약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말이 있다. 과장을 보태자면, 가만히 있으면 둘 중의 하나의 쪽으로 자연스레 빠진다는 것이다. 이런 압박 때문에, 이제는 사회, 교육 등의 '시스템'이 강요하지 않아도 비교심리가 생기기 쉬운 환경이다. 누구나 하위권에 늪에 빠질까 불안에 떨기보다는 안정적으로 상위권에 머물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나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 비교문화에서는 누군가가 행복하면 다른 누군가는 불행하게 된다. 또한, 세상은 넓고, 허물어져가는 국경 때문에 비교 대상이 전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커져가는 비교집단에서 당신이 항상 우월한 편에 있을 거라고 말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즉, 사실상 승산이 없는 ‘게임’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우리의 시스템만은 되도록 비교경쟁을 지양하여, 비교심리를 자제시키는 편이 건강하다.

또한 사회적으로 퍼진 비교경쟁 분위기는 획일화와 같은 맥락이다. 중학생 때였던가,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가 섞인 '비빔밥' 문화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어른이 돼서 보니 우리나라는 정 반대인 흰쌀밥에 가깝다. 흰쌀밥에 검은 콩이라도 한 개 섞였다 치면 밖으로 빼놓는, 단일성을 중요시하는 문화다. 이런 단일성은 비교경쟁문화와 같은 문맥이다. 미국의 경우엔,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살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양하단다. 각자 매력적인 포인트가 다르니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비슷하다면, 한 가지 기준에 의해서 개개인의 순위를 매겨 비교하는 것은 무척 쉬울 것이다.



경쟁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행복을 느끼는 원천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자유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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