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페이스 혁명의 시대를 읽는 새로운 지문화학
이어령 교수의 서재에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교수는 그 책들 대부분을 '시체 안치소의 관'이라 부른다. 나온지 오랜 시간이 지난 '죽은 지식'이란 말이다. 실제로 대중이 시중에서 접하는 많은 책들이 10년이 지난 아이디어로 만들어져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책으로 나오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이론이 책으로 나오려면 먼저 그 이론이 학술지에 발표되거나 강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에 대한 근거나 연구 결과가 모여야 한다. 결국 새로운 아이디어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기 까진 빨라야 2-3년이 걸린다. 반면 인터넷의 각개전투 같은 글, 동영상, 아이디어와 정보는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빗발치고 다양한 통찰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곳, 이를 지의 최전선이라 한다. 책에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들 중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들을 추려 소개한다.
마트에 가면 지역과 계절에 상관없이 한 곳에서 모든 과일과 야채를 볼 수 있다. 마트에 진열된 야채와 과일들은 모양도 반듯하다. 사과는 흠난 곳 없이 동그랗고 오이는 굽은 곳 없이 곧다. 그러나 밭에서 자란 모든 과일이나 야채가 곧거나 흠없이 깨끗한 것은 아니다. 사실 오이는 구부러져야 맞는 것이고 사과는 흠없이 둥글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규격에 맞춰 과일을 생산한다 규격에 맞지 않는 것들은 버리고 규격에 맞는것들만 진열한다. 모든 과일과 야채는 햇볕을 받고 땅에서 자라난 생명이지만 규격화되어 마트에 진열된 것들은 공산품과 다름없다.
미국 식품은 동남아시아에 비해 10배 이상 그리고 미국 내에서도 1970년대에 비해서 50배 이상 버려지는 농산물이 많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것이 우리가 식품의 가치, 생명의 가치를 일회용품 쓰는 듯해 감각적으로 느낄 수가 없게 된 탓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밥을 흘리면 가난해서 그 밥 한 톨이 문제가 된 게 아니었다. 쌀 한 톨을 귀한 것이고 하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곡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몰라서 쌀나무라고 했다. 나무에서 열매처럼 쌀이 열리는 줄 안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오늘의 인간들은 아날로그 결핍증을 겪는다고 한다. 우리에겐 사이버 세계가 익숙하다. 또한 앞서 말했듯 마트에 가면 규격화된 생명을 접한다. 자칫 도축하는 과정이 징그러울 수 있는 돼지고기나 소고기 또한 도축 과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은 깔끔한 포장에 담겨 나온다. 생명을 다룰 때 우리가 느끼는 감각, 피를 흘리고 징그러울 수 있는 아날로그 감각이 부족하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 중에 닭다리가 4 개인 줄 아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닭고기는 먹지만 살아있는 닭이 닭고기가 되기까지 과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아날로그의 현실 감각을 잃을 수 있다. 일본의 한 초등학생이 친구의 목을 커터칼로 찌르고서, 상대방이 아파할 줄 몰랐듯이 말이다.
아날로그 결핍증은 우리가 당연시 여긴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 다음 세대에 더 가까이 와있다.
얼마 전 마트의 전자제품 코너에 갔다가 VR 체험을 했다. 가상현실로 해부학을 학습하는 체험이었다. VR 헤드셋을 쓰면 내 눈앞에 사람의 몸이 뉘어진다. 보고 싶은 곳을 손으로 가리키면 그 부위의 장기와 뼈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미래에는 이런 식으로 아날로그 시절엔 당연시 여겼던 자연현상과 생명에 대한 감각을 '체험'하고 '학습'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규격화된 경험을 통해 느끼는 생명에 대한 감각이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시각과 의식은 편협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예전보다 빠르게 정보를 찾고, 훨씬 많은 정보를 습득한다. 옛날엔 알고 싶은 정보가 있으면 도서관에서 책을 뒤져 가며 찾았지만 이젠 인터넷 검색창에 키워드 입력 한 번으로 전 세계의 도서관을 뒤진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로 과잉 정보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보고 싶은 정보만 선택해 습득하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날의 개인은 예전의 개인보다 좁은 범위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서는 사용자가 검색한 검색어의 관련 키워드를 제공해주고 유튜브, 넷플릭스나 멜론과 같은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는 내가 좋아할 만한 미디어만을 선별해준다. 광고 조차 사용자의 인터넷 사용 기록을 분석해 사용자에게 맞는 광고를 제공해주는 형태로 진화했다.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만 선별하고 소비하게 되는 환경에 살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정작 예전엔 다른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따로 관심을 가져야 알 수 있는 '단절된 정보'들이 많다.
큰아버지께서 일가친척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적이 있다. 큰아버지가 자랄 때만 해도 친척끼리 같은 마을에 모여 살았고 떨어져 살더라도 명절이나 제사 때 만나 인사하고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먼 친척이라도 큰아버지는 그분의 성격부터 시작해 집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줄줄 꾀고 계셨다. 먼 친척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은연중에 있었던 '먼 친척은 먼 친척일 뿐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옅어지고 '먼' 친척이지만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위로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가 내가 생각한 가족의 울타리였다면 이제는 직접 본 적은 없어도 같은 성을 공유하는 '먼 친척'들도 '내 가족'이 되었다. 내가 소속감을 느끼는 가족의 경계가 넓어진 것이다. 분명 이런 친척에 대한 정보는 예전이었다면 자라는 과정에서 할아버지, 큰아버지, 삼촌에게서 소식을 듣거나 친척들과 한 마을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큰 명절이라도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요즘엔 내가 직접 찾아 나서야 알 수 있는 '단절된 정보'가 되어 버렸다.
나는 '단절된 정보'에 개인의 인간성과 정체성에 영향을 끼지는 요소가 많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어떤 사람들과 같은 성씨를 공유하는지, 예전엔 어떤 어휘를 썼고 왜 지금은 쓰지 않는지 등의 '단절된 정보'는 일상생활의 배경에 관한 지식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는 개인이 그 지식에 감정을 입히는 과정에서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먼 친척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느끼던 가족의 울타리가 넓어졌고, 생명이 있는 닭에서 내가 먹는 치킨이 되는 과정, 그 과정에서 피가 튀고 살이 잘리는 생명에 대한 감각을 경험하고 나서야 그에 관해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채식 주의자가 될지 육식을 할지, 닭을 먹을지 말지는 생명이 음식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나서야 선택할 수 있다.
요즘 사회에서 정체성이 흔들리는 개인이 많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선 자신만이 가진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삶에 대한 배경지식을 제공하는 '단절된 정보'는 흔들리는 정체성을 잡아줄 수 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만들어진 과정, 내가 먹는 음식이 만들어진 과정이나 생각하지 못했던 먼 친척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이 순간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해질 것이다.
서양의 사고방식은 동전처럼 앞뒤 두 가지로 나눠지는 이분법이다. 책에서 나온 예와 같이, 햄릿의 to be or not to be로 나눠진다. 모든 것이 상반된 두 개의 대칭으로 이뤄져 있다는 패러티 법칙은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잘 나타낸다. 서양인들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두 가지로 나뉘던가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서양이 산업 사회의 발전을 이끌었던 이유 중 하나다. 1mm, 2mm의 오차를 줄여 정밀한 기계를 만들고 작은 부분을 놓치지 않는 세밀한 기술이 과학 발전을 도왔다.
반대로 동양은 세상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자칫 이분법으로 보일 수 있는 동양의 '음과 양'은 상반된 두 성질이 아니라 그 둘의 조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가위바위보처럼 말이다. 가위는 보자기에게 이기고, 보자기는 바위에게 이기고, 바위는 가위를 이긴다. 동양에선 세상을 둘로 나누기 보단 여러 요소의 조화로 보고 작은 것을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이 열 길 물속 재는 방법으로 한 길 사람 속 재려 하고, 한국 사람이 한 길 사람 속을 재는 방식으로 물질의 세계를 재려고 하는 그때 비극이 생겨나는 거야.
둘 중 한 가지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곳에 적합한 것을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물리학처럼 말이다. 현대 물리학은 고전 역학과 양자역학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전 역학에선 물체의 위치, 운동량 등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고전 역학과 다르다. 입자의 정확한 위치를 구하면 운동량을 알 수 없고 운동량을 구하면 위치를 알 수 없다. 확률로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가지 종류의 물리는 사용하는 곳이 다르다.
지금까지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많은 발전을 이끌어 왔다. 증기 기관의 발명부터 반도체 기술까지 과학기술의 발달은 작은 것을 정밀하게 다루는 사고방식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컴퓨터는 사람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정밀하고 정확한 계산이 가능해졌다. 사람이라면 불가능할 엄청난 양의 빅데이터를 수집하는 것도 컴퓨터는 가능하다. 세밀하고 정확함에서 인간은 기계를 따라올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때가 동양적 사고방식이 등장할 때가 아닐까? 빅데이터를 수집할 수는 있지만 분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빅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절대 이차 함수의 그래프처럼 두 가지 요소만이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식당에서 팔리는 메뉴만 분석한다 하더라도 그날의 날씨, 시간, 상권, 사회적 이슈 등 수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요소의 조화를 생각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보여줄 것이다.
한국말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흑백의 경계를 넘어선 애매하고 이상한 말들이 많다.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것을 뜻하는 '엇비슷'이 그렇고 서지도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이라는 말이 그렇다. '거시기와 머시기'도 그런 탈 결계를 나타내는 애매어 가운데 하나다. 동시에 그것은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의 언어이기도 하다.
동양의 철학은 모호할 수 있다.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런 모호함에서 다른 것들을 창조할 수 있지 않을까? 서양의 사고방식이 근대사회의 발달을 이끌었던 것처럼 동양의 모호함이 인류 사회의 다음 세대를 이끌 수 있다. 확실한 건 없다고 양자역학이 말해주고 있다. 또한 서로 다른 분야를 섞는 융합과 창조가 새로운 세계의 발전 방향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말에는 애매한 말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거시기, 머시기'다. 우리가 거시기, 머시기 할 땐 말하고 싶은 어떤 것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거나 말로 표현하기 힘들 때 쓰는 말이다. 그걸 들은 상대방은 짐작하고 추측한다. 완벽히 같은 것을 떠올릴 순 없어도 비슷한 느낌을 공유한다. 나는 우리의 철학도 이처럼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고 같은 느낌과 감성을 공유하는 창조의 과정에 근간은 동양 철학이 될 것이다.
인간의 정신 속에 고착되어버린 이항 대립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 해체하는 것, 넘어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랫동안 문인들이 언어를 통해서 꿈꿔오고 예술가들이 색채와 소리를 통해 얻고자 한 판타지입니다. 상징, 비유, 반대의 일치, 공감각…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 수사법과 예술 기법들은 either-or의 선택적 세계를 both and의 창조적 융합의 세계로 구축해온 예술가들의 피요, 땀이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친구들과 대화할 땐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하지 않는다. 요즘 사는 이야기, 직장 이야기, 올림픽 이야기나 어제 읽었던 블로그 이야기 등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뿐이다. 「지의 최전선」도 이와 비슷하다. 죽은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날것 그대로의 지식을 다루기 때문에 하나의 결론으로 확실한 끝맺음을 할 수 없다. 지의 최전선에서 오가는 다양한 주제들을 소개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도 정보를 열거하기만 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저자는 나름대로 주제별로 '마무리' 하려 한다. 하지만 그 '마무리'라는 것이 전부 비슷하다.
요약해보자면
생명화
생명 경제
동과 서양을 합치자
그 중심엔 반도의 나라 한국이 있다
로 귀결된다.
하지만 생명화가 뭔지 무엇이 생명 경제인지 정확히 명시하지 않고 동과 서양을 합치는데 구체적인 방안이나 예가 없다. 그래서 글에 나왔던 떡밥들을 나열하고 복잡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느슨한 결론으로 마무리한다고 느껴진다.
「지의 최전선」은 중앙일보 정형모 기자가 6개월간 매주 이어령 교수와 나눈 대화를 정리해서 S매거진이란 문화 잡지에 기고한 기사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의 대화라기 보단 이어령 교수가 이야기를 하고 정형모 기자가 박자를 맞춰주는 식의 흐름이다. '박제된 지식이 아니라 살아 펄떡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는 정리되었거나 하나의 이론으로 합쳐지지 않은 지식들을 묶은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흐름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도 하고 결국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를 챕터가 많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단단한 구조로 이뤄진 하나의 아이디어를 기대하기보다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이렇게 엮일 수도 있구나'하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이어령 교수와 대화하듯 읽으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