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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하다, 는 동사

아날로그, 자신을 위로하는 최고의 기술

음악 듣는 걸 좋아한다. 일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책을 볼 때도 항상 음악을 켠다.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마음껏 골라 듣는다. 아주 편리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너무 쉽게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가볍다고나 할까. 한 곡 한 곡이 소중한 느낌이 없다. 한 번 뽑아 쓰고 버리는 티슈 같다.     


중학생 때부터 레코드(LP)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한 주 용돈을 다 쏟아부었다. 큰형으로부터 용돈을 레코드 사는 데 다 써버리면 어떡하냐고 핀잔을 들으며 모은 것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한 장 한 장이 사연이 있고 언제, 어디서 샀는지 기억도 생생하다. 그때는 친구들한테 생일선물도 미리 레코드판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레코드, 카세트테이프, 시디, 엠디(MD)까지 그동안 모아 온 게 많다. 플레이어도 여전히 갖고 있다. 모두 싸구려 오디오들이지만 내게는 아주 소중한 보물들이다.      


옛날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려면 제법 번거롭다. 스트리밍 방식으로 음악을 듣는 것에 비하면 10배는 귀찮은 수준이다. 스마트폰으로는 터치 서너 번이면 끝날 일일 텐데 아날로그 방식으로 음악 듣기는 몸을 여러 번 움직여야 한다. 레코드로 음악 듣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오디오부터 켜고 앨범을 고른다. 그리고 앨범에 먼지가 없는지 살펴 깨끗하게 닦아줘야 한다. 그다음 듣고자 하는 곡에 맞춰 카트리지를 정확하게 옮겨야 한다. 그리고 내리면 드디어 음악이 흘러나온다.      


오디오 음질 차이까지 신경 쓰며 음악 듣는 타입은 아니다. 레코드는 레코드대로 카세트테이프는 또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 재밌다. 음질보다 그 기기들을 다루는 각기 다른 맛이 있다. 음악을 듣기 이전에 음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는 손맛이 남다르다. 손맛은 만지는 촉감에만 그치지 않는다. 과정 하나하나가 그때의 추억을 함께 소환해준다. 레코드 가게로 가 사서 돌아오는 그 길부터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까지 내 몸 안에 든 그 음악에 대한 DNA를 되살아나게 한다. 몸에 기억되어 있던 음악을 온몸으로 되살리는 맛이 있다.     


좀 다르지만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는 것과 커피를 손수 내려 마시는 것도 다른 맛이 있다고 생각한다. 커피 맛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스턴트커피를 준비하는 것과 드립 커피를 준비하는 그 과정이 다르다는 말이다. 인스턴트커피 마시는 데는 시간이 채 1분도 안 걸린다. 그야말로 인스턴트다. 드립 커피는 못해도 10분에서 20분 사이가 걸린다. 레코드를 플레이하려고 준비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드립 커피를 준비하는 것도 과정이 즐겁다. 기다림의 미학이 만드는 색다른 재미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무엇이든 하는 과정이야말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최고의 기술이다. 이게 아날로그 방식이 가진 참맛이다. 빠르게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제법 긴 시간 공을 들여 자신을 위로하는 행동의 재미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행복이지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도 행복한 과정이다. 한 끼를 라면으로 때우느냐 아니면 나를 위로하는 음식을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직접 할 거냐의 차이다. 빠른 결과물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자신을 위로하는 과정을 즐기는 삶, 그게 중요하다.


행복하다는 형용사다. 그래서 문제다. 행복하다는 행복, 하다, 로 동사여야 한다. 어떤 상태에 도달해야 행복한 게 아니다. 어떤 상태로 가는 과정이 행복이다. 그래야만 행복에 이르는 길이 손에 쥘 수 있을 듯 가깝고 갈 수 있을 만한 곳이 된다.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 행복해야 하는 거다.     


3월 20일은 세계 행복의 날이다. 지금 세계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게만 보인다. 온통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하다. 다시 행복한 날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애간장이 타는 사람이 많다. 예전 행복했던 순간, 상황으로 되돌아가려면 지금 멈춰버린 우리의 일상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달라진 일상에서 새로운 생활 기본값을 만들어야 한다. 행복하다를 형용사가 아닌 동사로 받아들이고 사소한 것이라도 내 삶을 위로하는 무언가를 시작해보자. 먹는 것, 듣는 것, 하는 것, 어떤 것이든 아날로그 방식이 제법 도움이 많이 된다. 한번 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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