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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am Aug 23. 2016

내 공부의 집은 어디인가

공부노동자의 삶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1987년 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최근 2-3년간 JTBC는 뉴스 보도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의 독창성과 높은 시청률로 유명했다. 그 대표선수 중 하나인 <비정상회담>의 출연진을 활용해서 인기를 끈 자매 격 프로그램의 이름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이다. 사실 이 예능 프로그램의 이름을 만드는데 강력한 모티브가 되었을 만한 영화가 있다. 바로 동명의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1987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 영화는 숙제와 관련한 아이들의 순수함과 우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아름다운 미장센은 영화의 주제 격인 순수와 잘 어울리며 잔잔한 분위기는 영화 말미에 나도 저런 순수함을 가진 시절이 있었던가 하는 먹먹함을 가져다준다.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주제는 아이들의 순수이겠지만, 이야기의 중심 소재는 숙제와 노트다. 친구 네마자데에게 노트를 전하기 위해 하루 종일 헤매는 아마드의 머리 속에는 반드시 숙제를 마쳐야만 하고 노트를 잃어버려 숙제를 못 할 네마자데는 내일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크게 혼나 교실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든 숙제를 자신의 손으로 마쳐야 한다는 아이들의 두려움은 소위 너무 때가 탄 어른들에게는 헛웃음이 나올만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나와 같이 공부를 업으로 삼은 노동자들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숙제, 즉 공부는 나 스스로의 손으로 마쳐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미루거나 완료하지 못했을 경우 체벌을 받는 아이들처럼 운명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사회적 잉여.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언젠가부터 공부의 길에 선 사람들은 공부를 마치든 미루든 중도 이탈하든 사회적 잉여로 취급받게 되었다. 정해진 숙명처럼 공부라는 굴레를 뒤집어쓴 사람은 사회적 잉여로 여기는 분위기가 자라나 이제는 팽배해지고 말았다. 억울하게도 말이다.



공부노동자?

책과 노트북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으로 가치를 생산할 수 있을까

현재 나의 일을 설명하자면 첫째는 책을 보는 것이고 둘째는 논문을 찾아보는 것이고 셋째는 두 자료를 바탕으로 메모를 하고 연구 아이디어를 적거나 정리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행위를 "일"이라고 표현했는데, 한자로 바꿔 표현하면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좀 거창한 말로 하자면 나는 공부노동자다.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사전으로 구성된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노동은 다음 두 가지 뜻을 지닌다.

노동 勞動 (파생어: 노동하다)
1.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2. 몸을 움직여 일을 함.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7544200)

이러한 사전적 의미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를 담지만, 그러한 정치적 담론을 피하고 이야기해도 사전에서 정의한 노동의 목적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한 행위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물자, 생필품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노동으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가치, 교환가치로서의 임금을 버는 수단으로 노동을 설명할 수 있다. 이 말은 뒤집어 살펴보면 임금을 벌지 못하면 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바탕에 두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공부는 정말 쓸데없는 것이 된다. 석사든 박사든 어떤 형태의 학위든 그것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 공부와 연구는 교환가치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공계 석박사생들조차도 기업으로부터 연구비를 수주받아 가치(돈)를 생산해내는 듯 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매매하는 행위일 뿐, 기술을 통해 직접적인 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공부와 연구를 구성하는 공부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접적인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볼 수 있다. 학위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미래에 받을 임금 가치를 위한 것이라고. 모든 학위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학위를 마치고 나면 경력으로 인정받고 더 많은 임금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비단 이공계뿐만 아니라 문과 학위조차도 관련 경력으로 인정받기만 한다면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에 미래의 임금 가치를 위해 공부노동자들은 책을 읽고 노트북을 타이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부노동의 목적이 미래 임금 가치를 위한 것이고 지금 당장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면 나의 공부노동은 허무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나는 교환가치를 직접적으로 생산하던 지금 당장의 임금을 버리고 공부노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금 이외에 다른 가치를 만들기 위해 나는 직장을 뛰쳐나왔다.



사회적 낙인, 잉여

문과 공부노동자는 종종 이런 시선을 받곤 한다

그렇게 거창하게 출발했지만 공부노동자로서의 내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언급한 것과 같이 공부노동은 임금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공부를 하기 위해선 추가 노동을 해야 했고, 그것은 또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문과 공부노동자들은 기업에서 수주받을 수 있는 연구비라는 것도 없기 때문에 등록금과 함께 스스로 연구비를 충당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져야 한다. 아무런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사회적 잉여, 그것이 문과 공부노동자를 둘러싼 주위의 시선이다.


이런 시선을 대변하는 것이 정부의 프라임 사업과 코어 사업이다. 프라임 사업은 문과계열 학생들의 수를 줄여 이공계열 학생수를 늘려주는 것이고, 코어 사업은 침체된 문과 학문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언뜻 듣기에, 프라임 사업이 문과 계열 학생들에게 위협인 것은 사실이지만 코어 사업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할 수 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코어 사업이 침체된 문과를 살리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지만 선정된 대학들의 사업 목표를 살펴보면 교환 가치 증진에 기여하겠다는 자본주의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추구하는 전통적으로 문과에서 생산되던 가치와는 다른 방향의 사업인 셈이다.


이런 정부의 냉대와 사회의 매몰찬 시선 속에서 문과 공부노동자들의 삶에 남은 것은 절망밖에 없다. 가뜩이나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졸업하고 나서도 취직하기 어렵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하는데 문과 대학원생들이 졸업하면 할 수 있는 일이 그들보다 많을 리가 없다. 비싼 등록금을 내며 스스로 용돈을 벌어서 겨우 마친 학위 끝에 나와 같은 공부노동자들이 맞이하는 현실은 깜깜한 밤이기만 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할 공부

돌아가기엔 너무 깊이 들어와버린 책들 사이의 길

주식쟁이들이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 손절매. 어떤 회사의 주식에 투자를 했지만 손해가 났을 때 재빨리 털고 나와야 손해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손절매를 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오를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떨어지는 주식을 놓지 못하다가 결국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손절매를 했다면 약간의 손해만 보고 다른 주식에 투자할 수 있었겠지만, 헛된 희망을 품다가 결국 투자금을 모두 날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공부노동자들은 항상 고민을 한다. 지금이라도 공부를 포기하고 취직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기서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손해를 덜 보는 길은 아닐까 하고. 주식쟁이들이 손절매라는 말은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듯이 공부노동자들도 공부의 '손절매'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고민을 할 때쯤이면 공부의 늪에 너무 깊이 빠져서 빠져나오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때 포기하기에는 이미 들어간 투자금이 너무 많아 포기한다면 휴지조각만 남아버린다. 지금 하고 있는 학위라도 마쳐야 원금을 회복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손해라도 덜 보기 때문에 꾸역꾸역 학위를 마치고 만다.


그런데 공부에 대한 손절매라는 가치평가는 앞서 논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이다. 학위를 하고 있는 목적이 돈이라는 유일 가치 생산에 있고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는 가급적 빨리 포기할수록 손해를 덜 보는 것이라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이러한 생각으로 공부를 가치 평가할 것이었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공부를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노동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생산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5월 공부노동자들 모두에게 감동과 반성을 준 기사가 나왔다. 한 판사 출신 로펌 변호사가 홀연히 한국을 떠나 73세 나이에 미국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것이다(관련 인터뷰 http://news.joins.com/article/20091118). 그 변호사가 한국을 떠난 나이는 66세로 보통 사람이라면 은퇴했으니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절대 하기 힘든 나이다. 더욱이 나이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심하게 요구하는 한국사람이 그 나이에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자신의 전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공부를 새로 시작해 박사까지 마치는 일은 자못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만약 그가 돈이라는 가치만 보았다면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가 본 것은 돈이라는 가치가 아닌 것이다.


즉 공부노동자는 미래의 돈을 가치로 두고 노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현재의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이다. 다른 노동자들이 그러하듯이 책과 논문, 노트북을 가지고 세상을 조망하는 새로운 시각, 가치를 생산하는 존재. 바로 공부노동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인간이 살아가는 원리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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