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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테나 Oct 24. 2018

<펭귄 하이웨이> 신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성장 스토리

머리도 식힐 겸, 부담 없이 재밌고 귀여운 애니메이션 한 편 볼까 싶어서 신청한 시사회였다. 푸른 하늘 배경으로 귀여운 펭귄과 똘망한 소년이 나오는 영화 포스터를 보며, 동화처럼 예쁜 판타지를 상상했었나 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곳곳에서 진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상징들과, 크게 다가오지 않는 이야기 구성, 직접적이면서 모호한 작가의 메시지들을 혼란스럽게 접하고 나니, 영화가 끝난 뒤엔 허탈한 웃음이 났다. 하하하... 영화 속 주인공 아오야마가 '펭귄+누나+바다'의 비밀을 풀기 위해 고심하며 연구했던 것처럼, <펭귄 하이웨이>는 다양한 상징에 대한 해석과, 희미한 연결고리라도 발견할 수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영화였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흑흑...


 우선, 영화가 가진 난해함부터 이해해 봐야 했다.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니 "순수한 앎의 기쁨을 전하고 싶었다"는 '이시다 히로야스' 감독의 인터뷰가 눈에 들어온다. 설마... 관객들 스스로가 난해한 영화를 연구하게 만들어, '앎에 기쁨'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영화를 난해하게 만든 것은 아니겠지?  


여기저기 살펴본 결과, 영화적 난해함의 뿌리는 감독의 의도라기 보단, 원작 소설 '펭귄 하이웨이'의 작가 '모리미 토미히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작가는 소설 '펭귄 하이웨이'에 대해,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처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과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경계선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 생각했던 근원적 의문과 욕망 그리고 꿈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쏟아보았습니다."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의 의도대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요소들은, 소설과 영화 속 '모호함'의 원천이 되었고, 그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선 논리적 체계보단, 무의식과 연상작용, 상징 등을 이해하는 방법 밖엔 없을 듯하다. 자, 그럼 지금부터, 작가가 만들어 놓은 영화 속 상징과 희미한 연결고리들을 한 번 살펴보자.


<애니메이션>                                                <소설>


신화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첫사랑 누나.

영화 <펭귄 하이웨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탐구정신이 뛰어난 11살 소년 아오야마가 짝사랑하는 '치과 누나'를 이해해야 한다. 영화 속 이야기는, '치과 누나'가 만들어 낸 신비한 펭귄이 마을에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오야마가 '치과 누나'의 미스터리를 풀고, 누나와 함께 마을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특히 아오야마는, 연구노트를 작성할 만큼 치과 누나의 가슴에 대해 관심이 많다. 성(性)적 표현이 비교적 익숙한 일본 애니메이션이기 때문 인지, 영화 속엔 여러 번에 걸쳐 누나의 가슴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 나오고, 가슴 모양 케이크가 등장하기도 한다. - 뒤에 설명하겠지만 여기엔 다른 이유가 있다.- 성(性)에 대한 노골적 표현이 낯선 우리나라에선, 이 부분에 대해 불쾌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난 나름 사춘기 소년다운 관심 정도다고 생각한다. - 내 경험에 의하면,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조차, 포물선 2개의 정점에, 점을 콕! 콕! 찍어 놓고는, 여자 젖가슴이라며 낄낄 거리며 웃는 것이, 남자 아이들이다.-  다만, 영화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태도와 방식이 중요한데, 누나의 가슴에 대한 아오야마의 관심은, 음흉한 성(性)적 느낌은 거의 없다. 그저, 좋아하는 누나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일종으로, 똑똑한 듯 하지만 엉뚱한 것에 관심이 많은 아오야마의 캐릭터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누나'는 평범한 첫사랑 누나가 아니다. 콜라캔이나 돌멩이로 펭귄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 펭귄을 잡아먹는 '재버워크'를 만들기도 하며, 밤에는 펭귄이 아닌 박쥐를 만들어 내는, 이상하고 신비한 존재에 가깝다. "나는 뭐든지 만들어 내!"라는 누나의 말처럼, 무생물을 살아 있는 생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진 누나는, 죽어있는 것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또, 스스로 만들어 낸 펭귄이 너무 많아졌다 싶을 때는, 펭귄을 사냥하는 '재버워크'까지 만들어 내서, 넘치는 것을 경계하고, 균형을 잃지 않게 하는, 완벽한 질서와 조화의 원리를 스스로 구현해 내기도 한다. 마치 조화와 균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대자연의 섭리처럼 말이다.


누나의 이런 비범한 능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 속 신들의 능력과 다르지 않다. 만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능력, 동양 신화 속 대지모신(大地母神)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아르테미스(Artemis)를 떠올리게 한다. 대지모신의 경우, 명칭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땅이 곧 어머니라는 개념에서 비롯한 신으로, 생명의 근원이자, 대자연이 가진 질서와,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이 대지모신의 개념을 가진 서양 신화 속 인물은, 3대 여신 중 한 명인, 아르테미스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르테미스를 사냥과 달의 여신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것은 매우 평가절하된 해석이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르테미스의 근원은, 크레타 산맥의 어머니신에서 비롯한 지모신(地母神)으로 , 야생동물과, 사냥, 순결, 출산,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최고의 여신이라고 한다. 지모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녀는 모든 동식물, 생명체들의 어머니로서, 생명력을 부여하거나 빼앗을 수 있기 때문에 대자연의 섭리와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그래서 자연의 변화와 원리가 그대로 보이는 달의 여신이 되는 것이고, 동물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사냥의 여신이 되는 것이다.-  특히 아르테미스의 신전이 있는 터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조각상과,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아르테미스 조각상은 독특하게도, 수십 개의 젖가슴이 달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르테미스가 풍성한 생명력 전파를 의미하는, 다산과 풍요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아르테미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이쯤 되고 보면, <펭귄 하이웨이> 속 '치과 누나'의 캐릭터가, 지모신 격인 아르테미스의 캐릭터성을 가져온 것이란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아르테미스의 젖가슴은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니, 아오야마가 누나의 가슴 연구에 집착하는 것은, 누나가 가진 아르테미스의 상징성을 부각한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설정이 된다. 또, 누나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의 상징이기 때문에, 아오야마가 누나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것은, 곧 대자연에 대한 사랑과 연구를 의미하게 되고, 그것은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는 아오야마의 캐릭터성에도 부합한다. '펭귄 하이웨이'는 이야기 속 캐릭터에 신화적 상상력을 융합시킴으로써, 이야기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복합적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징적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경우, 아오야마를 성(性)적 호기심에만 치중하는 아이로 오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세상의 끝, 또는 또 다른 세상 '바다'

영화 속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누나만큼 중요한 상징 중 하나가 '바다'이다. '바다'는 아오야마의 친구, 하마모토가 마을의 깊은 숲 속 들판에서 발견한 것으로, 바닷물의 질감을 가지고 허공에 떠있는 거대한 공 모양의 물체를 가리킨다. 하마모토와 아오야마, 우치다는 이것을 함께 연구하기 시작하고, 이 물체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대학 교수인 하마모토 아버지가 참여하는 연구단이 꾸려져, 국가적 차원의 조사가 시작된다. 그 후, 점점 커져가던 '바다'는 어느 순간 연구단을 집어삼켜버리고, 마을 전체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허공에 떠 있는 '바다'라는 물체가 아오야마가 궁금해하던 '세 끝'의 의미와 중첩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아오야마의 생각을 이끌어 주는 존재로, 아버지가 꽤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아버지는 아오야마에게 주머니를 뒤집어 보여주며 아오야마가 관심 있어하던 '세상 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쩌면, 주머니의 안과 밖처럼, '세상의 끝'은  다른 차원의 세상과 바로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며, 언제든지 그 낯선 세상이 뒤집어져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아오야마가 생각하는 '세 끝'이라는 것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자, '바다'라는 신기한 물체가 아오야마 앞에 등장한다. '세상 끝'이란 의미를 이미지적으로 상상해 보면, '땅끝'의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땅끝'엔 당연히 바다가 존재하고, 하마모토가 '바다'라고 명명한 그 이상한 물체는 '땅의 끝', 곧 '세상의 끝'에 존재하고 있는 땅과는 다른 또다른 세상으로서 바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바다'는 '다른 차원의 또 다른 세상'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좀 자세히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이 요상한 '바다'라는 물체가, 현실의 자연 질서 속, '바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자란 빽빽한 나무들의 공간, 즉 땅의 기운이 가득한, 숲이라는 공간 속에, 공의 형태로 둥둥 떠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숲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적 세계가 펼쳐지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특히나 일본에서 숲은, 신성불가침 영역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전해오는 이야기들 중엔, 숲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들도 많으며, 그들의 다양한 토속신앙과 결합한 신사들이 자리 잡은 신비한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 앞부분에 보면, 펭귄을 찾아 돌아다니던 아오야마와 우치다가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출입금지 표지판이 꽂혀 있는 트럭을 발견하는 것은, 숲의 이러한 의미를 보여주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의 끝'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다'를 발견한 숲은, 알 수 없는 세계를 품고 있는 신비한 공간의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숲 속에서 발견된 '바다'가, 땅(숲)에 둘러인 채, 동그란 형태로 허공에 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현실 정반대 모습으로 자연 질서를 표현함으로서, '바다'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끝' 또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침범해서 일까? '바다'에 대한 어른들의 본격적인 탐사 연구가 시작되자, 또 다른 세상을 품고 있던, '바다'는 급격히 팽창하게 되고, 연구단을 집어삼켜버리면서, '바다'는 마을을 위협하는 존재가 돼버린다. 마치 태풍이나 해일을 피하듯, '바다'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두려워하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연상시키면서 영화는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아무도 '바다'의 위험성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슴푸레 '누나'와 '펭귄' 그리고 '바다'의 관계성을 이해한 아오야마는, 누나가 가진 대자연의 생명력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마을을 지켜낸다.

 


소년 '아오야마'의 성장

아오야마는 그 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조금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의문만을 남긴 채, 들판으로 사라져 버리는 누나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아오야마. 첫사랑과의 이별도 의젓하게 받아들이며, '나는 울지 않고 살기로 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아오야마에게 운다는 것은,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걱정만 하는 어린아이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 영화 중반 부분에, 어린 동생이 뜬금없이 찾아와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걱정하며 우는 장면은, 이 말과 묘한 대비가 되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울지 않고 살기로 했다'는 아오야마의 내레이션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바다'의 위기를 지혜롭게 해결함으로써, 11살의 아오야마는, 자신이 누구보다 세상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연구를 통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오야마 자신만의 생각일 뿐이지만 말이다.




마무리

<펭귄 하이웨이>는 아오야마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일상 속 모험과 판타지를 그려낸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이야기 소재와 구성을 생각해 봤을 때, 모험담의 형식을 갖고 있어서, 평범한 일상과 대비되는 거대한 위험을 강조하며, 어린 영웅을 그려내는 대중적 내러티브로 갈 수도 있었다. 하 작가와 감독은 그런 구조를 취하지 않았다. 글 맨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작가는, 어린 시절 끊임없이 떠오르던 세상에 대한 질문과 호기심, 정확하게 알기 힘든, 어린 시절 바라본 세상에 대한 모호한 느낌을 판타지적으로 그려내고자 고, 감독은 그 소재적 모호함을 벗어나기 위해, 소년이 세상에 대해 연구하며 생각이 발전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적 성장을 하는 내러티브를 선택 다. 하지만 영화는 감독의 의도와 달리, 내면적 내러티브의 표현과 구조에  문제가 생기면서 관객들은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생겼고, 원작이 가진 풍성한 신화적 상상력은 오히려 영화적 난해함을 배가시켰으며, 나름의 독창적 의미를 가지고 배치한 상징들은 관객들에게 이해되지 못한 채 파편화되어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 영화가 잘 못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한 캐릭터 창조와 공간 설정은 독특했으며, 세상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소년의 생각 발전 과정은 찬찬히 생각해 보면, 체계적 구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만일 영화를 예술적 측면에서만 평가한다면, 주제나 캐릭터의 독창성 측면에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예술이자, 동시에 대중매체이다. 거대 자본과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영화 산업적 특징을 고려한다면, 재미는 필수 조건이 돼야 한다. 훌륭한 주제의식과 독창적 이야기를 가진 예술 영화들이 모두 재미없는 것은 아니며, 잔잔한 이야기 구조와, 풍부한 상징성을 특징으로 내세우는 영화들도 색다른 재미와 감정적 교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영화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펭귄 하이웨이>의 주인공, 아오야마의 생각이 발전해 가는 과정은 그리 재밌지 않다. 하나하나 사실들을 조합하고 연구하는 호기심 어린 마음이나 혼란스러움도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아오야마가 펭귄과 누나의 관계를 파악하고, 펭귄과 바다의 관계를 알게 되는 사실 확인의 놀라움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인 아오야마의 캐릭터 정서는 모호하고, 각종 상징들은 해석하기 어렵게 그려짐으로써, 관객과 소통하는 영화적 재미를 놓치고 만 것이다.


감독이 진정으로, 영화를 통한 앎에 기쁨을 관객들이 함께 느끼길 바랬다면, 아오야마가 발견하게 되는 단서들을 보다 치밀하게 구성하고,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아오야마의 생각이 발전하는 과정과, 감정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표현했어야 했다. , 앎에 재미를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극적 구조와 분위기를 만들어 냈어야 했다. 하지만 감독은 원작이 가진 모호한 정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형식적 구성을 치밀하게 계산하지 믓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재미있게 전달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작품의 독창성은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대중들의 마음을 훔치지는 못한 것이다.


<펭귄 하이웨이>는 전체 관람가 에니메이션 영화다! 만일,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 내게 영화에 대한 한줄평을 하라고 한다면,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 말이다!

"아이들은 <펭귄 하이웨이>를 재밌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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