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두어 번쯤 한 적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한글을 익히지 못한 친구가 있습니다.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강한 자존심의 엄청난 스크래치였던 그는 훼손된 자존심을 거친 말과 행동으로 덮어보려고 했습니다. 언제나 눈빛은 형형히 빛났고 비속어가 섞이지 않으면 말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운도 따라주고 이러저러한 것들이 맞아떨어져 한 학기 잘 보냈습니다. 그런데 큰 장애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학기 마무리 과정으로 글을 써야 하는데, 한글을 못 읽는 그가 쓸 수는 있겠습니까.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제가 묻고 그가 답하면 제가 타이핑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학기에 가장 인상적인 게 뭐야?
인상적인 거요? 인상적인 게 뭐냐면요.
그는 두 시간가량 싫었던 과목, 좋았던 시간은 물론이고 본인은 은밀했다고 생각했지만 모두가 알고 있던 짝사랑 이야기까지 늘어놓았습니다. “(거절당하고) 제가 얼마나 슬펐냐면요. TV에서 영화를 보다가 깡 생수를 마시면서 울었어요. 영화 제목은 모르겠어요. 그때 〇〇형이 같이 울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한 일은 적당한 호응(“응, 응, 응, 그렇지, 그랬구나.”)과 질문 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어땠는데? 누구랑 있었는데? 그다음엔 어떻게 했어?”)
그런데 그 친구, 두 시간을 말하고 난 후 (중간중간 “더 말해도 돼요?”라고 물었습니다.) 한결 편안해 보였습니다. 어떤 후련함이랄까. 한 학기 동안 지낸 삶들이 정확한 언어로 표현되어 종이에 적혀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떤 답답함이 해소된 것 같았달까요. 글쓰기를 놓고 어린 벗들이랑 실랑이를 하며 제 자신에게 “글은 왜 써야 하는가?”를 계속 물었는데, 그 친구의 글을 보며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확히 표현하는 도구로서, 삶을 직접 해석하고 재구성하며 삶의 주인으로 서게 하는 도구로서 유의미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메멘토)〉를 읽기를 청합니다. 여느 글쓰기 책과는 달리 〈글쓰기의 최전선〉은 글쓰기가 우리의 삶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를 먼저 말합니다. 삶과 글이랄까요. 함께 읽어가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읽은 부분이나 나눈 이야기에 따라 글을 써 봐도 좋겠습니다. 책과 글을 매개로 우리의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삶의 결을 더듬어보며 해석해보고 재구성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내 삶을 재구성하고 나로서 서보는 시작이랄까요. 저는 마라톤 주자 앞에서 뛰는 페이스메이커가 돼보려고 합니다. 은유 작가의 글로 마무리합니다.
다만 잘 쓴 글이든, 미완의 글이든, 숨겨둔 글이든, 파일로 저장하지 않고 날리는 글이든, 그런 과정 하나하나가 자기 생각을 정립하고 문체를 형성하는 노릇이며 ‘삶의 미학’을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못 써도 쓰려고 노력하는 동안 나를 붙들고 늘어진 시간은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기 한계와 욕망을 마주하는 계기이자 내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과 인사하는 시간이라고, 이제는 나부터 안달과 자책을 내려놓고 빈 말이 아닌 채로 학인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어떤 글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우리 어서 쓰자고.(p.35, 글쓰기의 최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