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중요성
2011년 말, 게오르게 엠비리코스가 죽기 직전에 갑자기 자신의 소유하던 폴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을 팔았다. 당시 가격으로 2억 5천만 달러. 지금 환율로 환산하여 계산해보니 약 3000억이다.(약 4년 후, 쿠닝과 고갱으로 인해 세잔은 1등 자리를 내어 준다.)
세잔은 2014년까지 지구 역사에서 가장 비싼 작가로 남게 된다.
3000억. 3000억이면 얼마 전 포스코가 매각한 송도의 약 40층 규모의 트윈 타워 건물의 가격이다. 그렇다면 그 건물과 97X130cm의 유화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즉물적인(?) 비교는 말하고 있는 스스로도 부끄럽지만 점심 값을 1000원이라도 아끼라고 외치는 우리의 주머니를 생각하면 자꾸만 떠오르는 여러 가지 '대안'들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3000억이 있었다면...)
세잔의 작품 이전에 가장 비싸게 거래된 작품인 잭슨 폴록의 <넘버 5>는 거래 당시 1억 4000만 달러로, 세잔은 잭슨 폴록의 작품과 비교해도 거의 2배나 되는 차이로 지구에서 '넘사벽' 작가가 된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을 그려낸 세잔의 가치는 무엇일까?
위의 그림은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라는 작품이다. 말 그대로 사과와 오랜지를 그렸다.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수백억에 팔린다.(환율 계산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농담처럼 던진 '돈'의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누구나 돈에 대해서 민감하다. 즉, 부자라고 해서 억 단위의 돈을 쉽게 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더욱 이해하기 힘든 세잔의 가치를 조금 더 확실하게 비교하기 위해 아래 그림을 살펴보자.
독일의 자연주의 화가 칼 슈흐의 작품인 <사과가 있는 정물>이다. 여기에도 사과는 잔뜩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쉽게도(?) 세잔처럼 비싸게 거래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은 심지어 세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나름대로 자기 스타일로 '개선'하면서 그렸을 텐데 그 가치는 감히 세잔과 비교할 수도 없다. 무엇이 동일한 대상을 보고 그린 두 작가의 그림의 평가를 이렇게 근접할 수도 없을 만큼의 격차를 만들어 낸 것일까?
정물화는 움직이지 않는 대상을 화가의
미적 시각에 따라 화폭에 담는 그림의 한 형태이다.
세잔의 작품에서 가지고 온 일부분에서 나타난 특이점을 답하기 전에 잠시 세잔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알고 가자. 먼저, 세잔은 왜 사과를 그렸을까? 정말 본질적인 질문이라서 나름대로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바로 잘 썩지 않아서였다. 다른 것들은 잘 썩어서 '또 보고, 또 보고'를 하는 것이 사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세잔이 사람을 그리는 것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짐작이 긴다. 사람은 살아있기 때문에 죽어서 멈추기 전까지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런 사람에게 세잔은 "사과가 움직이면 돼?!"라는 말을 했다고 하니 결국 세잔에게 정물의 대상은 고정된 것, 즉 움직이지 않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지닌 세잔의 정물화에서의 특이점은 도저히 한 시점에서 그렸다고 볼 수 없는 대상에 있다. 왼쪽의 잘 익은 사과는 위에서 본 듯하고, 오른쪽의 가지런하게 쌓여 있는 오랜지는 아무리 봐도 앞에서 본 것이다. 만약 사과와 오랜지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사과와 오랜지를 작가 자신이 '움직이면서' 그려야 한다.
결국, 하나의 그림 안에서 공간적 모순을 통해 '시간'은 더 이상 그림 안에서 멈춰 있지 않게 된다. 즉, 세잔은 인류 최초로 시간을 탈피한 그림을 그린 작가이다.
이집트의 벽화는 시간이 아닌 자신들의
욕망을 담고 있다.
혹여 시간을 탈피한 최초의 화가라는 주장에 반감이 생기면서 이집트의 벽화를 떠올릴 수 있다. 이집트의 벽화의 인물을 보면 눈과 가슴은 정면을, 나머지는 측면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부위를 하나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 그대로 눈도 그리고 싶고, 가슴도 그리고 싶어서 나온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개념의 유무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가와 아류 작가를 극명하게 나눈다.
위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던 칼 슈흐의 작품이 이제는 왜 그리 비싸지 않은지 짐작이 간다. 아마도 그는 세잔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접근했을 것이다. '세잔이 사과를 그렸는데 나도 한 번 그려야지'라고 말이다. 그러고 나서 무작정 그렸을 것이다. 자신이 보고 있는 정물을 최대한 '똑같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면서.
세잔의 그림 구성은 따라 할 수 있었지만 개념이 없는 공허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개념'과 '개념화'의 중요성이다. 즉, 개념도 없고 개념화는 더더욱 되지 않은 칼 슈흐의 작품은 정물화 이상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개념화를 이뤄낸 피카소의 작품은 세잔과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된다.
반면, 세잔 그림의 가치와 개념을 알고 접근한 작가가 있다. 바로 피카소이다. 피카소는 세잔의 그림을 철저하게 이해한다. 즉, 세잔 그림에 담긴 구성이 아닌 그의 개념을 이해한 것이다. 스스로 개념을 완전하게 체화한 후에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하여 지금의 피카소가 된다. 세잔의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피카소의 작품은 더 이상 세잔과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인 그 자체가 된다. 하지만 피카소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천재가 아닌 그 안에 깊숙하게 세잔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것은 창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창의적인 것을 '새로운'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것을 하고자 끊임없이 머리를 쥐어짠다. 또한 다른 누군가의 작품이나 이론을 보고 '아, 그렇구나. 그러네'라고 다 이해한 것처럼 여기고 넘어가서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처사는 어쩌면 우리가 또 다른 칼 슈흐가 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의 '개념'을 아는 것부터 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