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2주 동안에 걸쳐 읽었다. 그 사이 나의 마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책의 영향도 있기도 했지만, 다른 것에서 인상을 받은 것도 있다. 우선 이 책의 저자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리고 타르콥스키라는 영화감독 또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을 깊이 받은 사람이다.
먼저 타르콥스키는 현대 사회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여기며 자신의 영화를 만든다. 그는 예술가의 지위를 높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상업 영화는 관객에게 감정과 감동을 주지만, 예술 영화는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
타르콥스키 감독이 만든 7편의 영화를 저자가 풀이하는 식으로 책은 전개된다. 여기에 타르콥스키가 쓴 책 <봉인된 시간>의 내용이 첨가되는 형식이다. 그리고 이것을 철학자의 이론과 개념을 연결해 저술했다.
처음에 이 책을 읽으며 좋은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교회를 다시 나가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할 때여서 그랬다. 첫 영화에서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이야기하며, 현대인의 세속화를 설명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정신의 성숙을 말했다.
타르콥스키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그가 믿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가르침이 그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불완전하고 인간의 겉치레는 믿을 수 없다는 식이다. 대안으로 완전하고 인간의 정신세계를 제시했다.
그가 만든 7편의 영화는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며 시간 순서대로 만든다.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부터 마지막 ‘희생’은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와 주제 의식은 명확하다.
자신이 자랐던 공산주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사회 이탈리아로 망명하는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치명적 단점을 건드린다. 이 책을 읽고 앞으로 읽고 싶어진 주제의 독서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 읽었던 책의 마지막 부분의 내용이 인상적이다. 그대로 옮겨 본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실용적 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이기주의와 물질 숭배를 극복하고, 모든 이성적 합리적 법칙성에 반하여,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수도사처럼, 성스러운 바보들처럼, 피곤에 지쳤을 때조차 환멸에 빠지지 않는 아틀라스처럼, 낭떠러지에 선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킬 자유를 우리도 가질 것인가?”
역시 책은 인간의 숭고한 정신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나의 태도가 변해서 그런지 종교적 구원을 말하는 타르콥스키와 저자의 입장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처음의 나였으면 이 책에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를 비판하고, 좀 더 대안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며 이상주의를 말하는 것에 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건강한 삶’을 주제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 선택은 독자 스스로 하기로 믿는다. 기본적으로 반골 성향이 강한 나는 이 책의 접근을 신뢰했을 것이다. 아니, 현재 상태를 비판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끌렸을 것이다.
책 제목에 구원을 말하다, 는 문장이 들어가 아마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 이 책의 주된 독자일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읽으며 신앙을 믿는다기보다는, 신앙을 아는 사람의 단계에 만족하기로 난 선택했다.
이것은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부분이다. ‘믿음이 모든 앎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동의하는 관점에서 읽고 이해했지만, 지금의 난 신앙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모습이다. 타르콥스키가 영화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을 명확히 받아들였지만, 기술과 과학의 발달을 따르는 현재 사회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