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여행지로 손꼽히는 낭만의 프라하.
사실 그다지 큰 기대없이 방문했다.
어차피 낭만따위는 나와 거리가 멀었고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이었다.
단지 동선을 짜다보니 넣을 수 밖에 없었을 뿐.
이렇게 냉소적이던 내가 단 이틀 만에 프라하를 낭만의 도시라고 형용해버렸다.
누구라도 붙잡고 얼마나 아름답고 보석 같은 곳인지 설명하고 싶으면서도,
함부로 가볍게 적어내리고 싶지 않은 곳.
아직까지는 혼자 마음 속에 꽁꽁 봉인해두고 싶은 곳.
가급적 말을 아끼게 만드는 곳.
딱 일주일을 지냈다. 첫 날은 도시 도처에 깔려있는 이방인들 탓에 지치기만 했다.
여행을 즐기는 이유는 나 홀로 이방인이 되는 기분이 썩 좋아서.
그러니 프라하나 파리같이 온통 이방인으로 가득 찬 곳은 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방인을 자석처럼 끌어 모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주일씩이나 머물렀음에도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아쉬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도시도 사람과 같다.
볼수록 매력적이고 볼수록 좋아진다.
나부터 진실하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도시는 그저 스쳐간 여행지 중 하나로 가치 절하되고 만다.
그렇게 금세 희미해진다.
무심코 지나쳤을지도 모를 거리, 건축물, 레스토랑 하나 하나에 존재감이 불어넣어지더라.
온 도시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되어 내게 말을 거는 듯한 경이로움을 느끼고야 말았다.
괜히 애틋한 마음에 사진이라도 한 장 더 남기고. 단 십 분이라도 더 머물다가 자리를 털고.
정말이지 이곳에선 감사한 일이 참 많았다.
프라하만큼 모순적이고 양면성이 두드러지는 도시도 없다.
저마다 입을 모아 낭만과 로맨틱의 대명사라 칭하는 도시 프라하.
그 이면에는 한국과 비슷한 투쟁과 혁명의 역사가 담겨 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
소련군에게 무참히 짓밟힌 시민들.
투쟁을 지속하기 위한 몇 차례의 분신 자살.
프라하의 봄이었다.
바츨라프 광장 곳곳에 아로새겨진 붉은 혈흔과 시린 상처들.
이것들이 무색하리만큼 광장은 지금 프라하의 최고 번화가로써 자리매김했다.
불과 5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좋은 친구들도 만났다. 아직까지도 연락하고 종강 때마다 만나는 인연으로 발전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친구들과 세계 3대 클럽을 목전에 두고도 망설이다 끝내 가지 못한 것.
서양 것들 사이에서 밋밋하고 샤이한 동양여자가 되기 싫어서. 너무 쫄보였지.
대신 까를교 옆 벤치에 앉아 블타바 강의 야경을 감상했다.
끝내 미련은 버리지 못하고 클럽 입장 줄에 서있는 사람들을 흘깃거렸지만.
프라하 성은 그 중 최고로 애착이 가는 곳이다.
가도 가도 좋았던지라 떠나기 전까지 그 성을 5번이나 오르고 또 올랐다.
흔적들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순간 한심한 나를 마주한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니 나름 즐겼던 것도 같다.
드라마틱한 플롯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이 성에서만큼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앞날을 고민한 곳도 없었다.
온갖 변수에 따른 시나리오를 전개하며.
가만히 앉아 한 시간동안 오로지 생각만 했음에도 그 생각의 매듭을 짓지 못했을 만큼.
이곳을 마지막으로 찾은 건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연주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후 저녁까지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오르간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는데 말 그대로 압도(overwhelmed)되었다.
고전 클래식을 들으면 자장가라도 듣는 듯 잠이 오던 내가 눈물까지 흘렸다.
정신적으로 워낙 약했던 시기라 그랬을 수도 있겠다.
얼마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고 화장터에서의 그 황망함이 어제의 일인 듯 생생했다.
그리고 이 감정은 예술이나 자연에 압도 될 때마다 여지없이 피어나곤 했다.
여전히 힘든 시간 속이었다.
좋은 사람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게 한다.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이 그랬고 이 도시가 그랬다.
당시의 일기에는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었더라면 하는 자조섞인 아쉬움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뭐 그리 부족하게만 느껴졌는지.
이 놈의 고질병엔 약도 없다.
여러모로 애틋한 도시.
너무도 좋았기에 다시는 찾고 싶지 않은 곳.
프라하는 내게 그런 곳이다.
늘 꿈을 꾼다.
언젠가는 꼭 유럽에서 공부를 하고 싶단 꿈.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살아보고 싶단 꿈.
그 언제가 되면,
그 때까지 또 다른 애틋한 추억이 많이 쌓여 이곳에서의 추억이 조금은 덜 소중해진다면,
그 땐 꼭 다시 프라하를 찾고 싶다.
카를교에 앉아 24살의 요동치던 나를 추억하며 코젤 맥주를 들이켜야지.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