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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ystal clear Nov 2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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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오랜만에 명동으로 출근하게 되어, 점심에 명동성당에 갔다. 내부는 처음 들어가봤는데,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26살의 나이에 순교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안 사실이었다. 쌀 한 톨 손에 남기지 못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가치를 위해 살다 눈 감는 26년의 생애란 어떤 생애일까.


그렇게 성당을 나오니 한 아저씨가 사탕을 팔며 구걸하고 있었다. 웃긴 얘기를 하나 하자면 서울에 처음 독립해서 올라왔을 때, 알바생이었던 나는 지하철과 거리의 모든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쥐어주곤 했다. 그냥 마음이 그렇게 갔다. 십년이 지나 월급쟁이로 사는 오늘은 아저씨의 눈길을 외면했다.


쉽지 않은 세상이다. 얼마 전에는 선릉역에서 디스커버리와 배달 오토바이가 충돌하는 사고를 목격했다. 너무 큰 소리가 나서 (사람이 다친 광경을 볼 것 같아) 차마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는데, 돌아보고 나니 디스커버리 차주는 내리자마자 차 긁힌 데 없나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다른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종교의 출발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감과 연민의 마음은, 나를 괴롭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날 선릉역에서 나는 일하다가 다쳐 피흘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기조차 두려웠다.


성당을 지나 을지로 골뱅이 골목을 지나면, 오래된 공업 상가들에서 인부들이 짐을 나르고, 오토바이로 이동하고, 노상에서 점심을 먹는, 골목골목 가지각색의 풍경이 펼쳐진다.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가지각색이어서, 디스커버리 차주와 김대건 신부가 같이 살고 있어서, 야속하고 또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나는 그 가운데 어딘가에서, 감당 가능한 이타성의 범위까지 발휘하며 살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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