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혜진 Nov 23. 2018

죽음에 대한 생각


며칠 전에 드디어 <보헤미안 랩소디>를 봤다. 영화의 만듦새는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대형 스크린에서 빵빵한 사운드로 듣는 퀸의 음악이 아쉬움을 모두 덮어버렸다. 사실 영화를 '본다'기보다는 '듣다'에 가까운 체험이었다, 이번에는 특히.


프레디 머큐리를 떠올리면 그의 폭발적인 목소리에 늘 감탄하고는 하지만, 그러다 금세 마음 한켠이 울적해진다. 그의 굴곡 많은 삶에 마음이 아프고, 그가 늙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나이 일흔이 훌쩍 넘어서도 끄떡없이3시간 넘는 공연을 하는 폴 매카트니의 노년을 보는 것처럼, 프레디 머큐리 그의 얼굴에 그의 얼굴에 세월이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직접적인 퀸 세대가 아닌 나도 이런 마음인데, 동시대에 퀸의 음악을 즐겼던 엄마아빠 세대가 느끼는 마음은 어떨지.


프레디 머큐리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서 안타까운 아티스트들이 너무 많다. 커트코베인도 그렇다. 난 아직도 너바나의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설레고 쿵쾅대는데, 커트코베인은 유서에서 밝혔듯 내겐 정열이 없다며 소멸되는 것보다는 순식간에 타오르는 편을 선택했다. 얄궂게도 그는 유서에서 본인과는 다른, 프레디 머큐리의 열정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너바나가 백스테이지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객석의 불이 꺼지면서 관객의 열광적인 환호성이 들려도
나는 아무런 감동을 느낄 수 없다.
관객이 보내는 애정과 숭배를 진심으로 즐길 줄 알았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단히 부럽고, 존경스럽다.

생의 마지막까지 커트코베인 그가 머릿속에 담았던 생각의 무게가 절절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조금 더 오래 남아주었다면, 그가 남긴 더 많은 음악을 들으며 행복했을텐데, 이런 마음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부재가 음악에 또다른 의미를 더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죽음과는 별개로 나 역시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다. 병에 걸린 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예정인 것도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내 방을 정리하면서 이곳저곳에 끄적인 메모를 모두 버려버렸다. 혹여 내가 죽고 나서 내가 남긴 찌꺼기 같은 메모들을 다른 사람이 볼까봐 두려웠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해석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앞으로도 난 내 나름의 죽음에 준비하는 방식으로 이런 식의 정리를 주기적으로 해나갈 것이다. 죽는 순간이 아름답게 기억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금은 이르게 가져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