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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oungalice Jun 25. 2021

드라마 '나빌레라'를 보며

한녀의 유럽구직수난기- 불리한 분야에 도전하는 일의 의미

드라마 '나빌레라'를 보며 발레라는 생소한 소재를 신기해하며 즐기고 있다. 한국인들은 발레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발레를 전공하며 뛰어난 실력을 가진 발레리나, 발레리노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기도 하다. 대학 때 수강했던 공연예술의 이해 수업에서 발레리나를 하셨던 공연 평론가 교수님께서는 한국만큼 타고난 신체적 조건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량을 갖춘 발레 전공자들이 많은 나라가 없다고 하셨다.최근 박세은 발레리나의 파리오페라발레단 에뚜알 승급도 352년 발레단 역사상 첫 동양인으로서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게 놀라웠다.


오늘 오전에 베를린 로펌과 면접을 봤다. 요지는 외국인 어쏘 변호사 채용 계획은 없으나 이력이 우리와 잘 맞으니 인턴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내용의 대화였다. 변호사가 16명인 작은 로펌인데, 터키 여자 변호사 1명, 브라질 여자 변호사 1명 외에는 모두 독일 변호사이고, 절대 다수가 백인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다지 유명한 곳이 아닌데도 유럽에서 비유럽인으로서 취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 인턴은 비자도 쉽고 월급도 적게 줄 수 있어서 그나마 지원하면 불가능하지는 않은데(그렇지만 인턴도 인터뷰를 1차, 2차에 나눠서 보고, 서면 시험을 보는 곳도 있었다), 정규직 채용은 쉽지 않다.


2008년에 이 분야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에는 마냥 좋았다. 신생 분야인 것도 좋았고,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느낌이 좋았고, 전문가가 몇 없는 분야인 것도 좋았다. 어렵게 한국보다 전문가를 더 많이 만나볼 수 있는 스위스 제네바 유학까지 왔는데, 지금은 기분이 좀 다르다. 이 분야가 유럽 백인 남성 중심적인 생태계를 형성하고 남미/인도 출신들이 그 아래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아시아 중에서는 그나마 싱가포르 출신들을 알아봐주지만, 한국인은 여기에서는 낯선 짐승이다.


별자리 운세에서 최근 이런 문장을 보았다.


"소가 푸르른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으면 매우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입니다. 한편, 소가 도심 한복판에서 아스팔트를 박차고 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충격적인 광경입니다. [...]

현대 도시의 아스팔트 위의 소는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의미를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마치 도시 한복판으로 튕겨져 나온 한 마리 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도 그렇다. 올해에는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소가 된 기분이다. 한국에서는 이 분야를 하는 사람이 적어서 답답하고, 모르면서 숟가락 얹는 사람들이 많아서 힘들었다면, 여기에서는 학교에서 토론할 정도의 기본적인 논의로 잘 정제된 법리들을 배울 수 있지만, 동시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유학 오기 전부터 어느 정도는 감수하고 온 것이지만서도 서글퍼질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뒤처진 나의 모습을 확인하는 기분이다.


통상 이럴 때 종래 나의 의식의 흐름은 '그렇다면 그 차이를 극복할 정도로 시간과 노력을 쏟아서 열심히 해야겠지'로 이어졌다. 특히 '열심히'에 커다란 방점이 붙었다. 20대에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해서 해결이 되는 일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흘러갈 뻔했는데, 드라마 '나빌레라'를 보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이 분야를 시작했을 때에는 '불리'한 분야에서 '도전'을 한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런 거였다. 이런 의식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억하심정을 쌓는 것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나빌레라'를 보면, 시대적 한계와 경제적 상황(처자식 부양 등)으로 인해 주인공 할아버지는 한 번도 자기가 하고 싶었던 발레를 하지 못한다. 연세도 많고 몸도 굳어서 아무도 그가 발레를 잘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는 자기를 둘러싼 현실적 의무에서 조금 자유로워지자 자연스럽게 발레를 배우러 간다. 그에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그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할아버지는 공연이나 어느 특정한 성취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하는 발레다. 젊었을 때 못 했던 시간들을 억울해하거나 한탄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어쩌면 내가 새롭게 장착해야 할 태도는, '불리한 차이를 노력과 독기로 극복한다'가 아니라, 진심으로 계속 공부하고 성장해 나가는 게 즐거우면 이어나가고 그게 아니면 자연스럽게 다른 즐거운 일을 찾아나가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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