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이기적인 이유로 자식을 낳는거고 태어날 아이한테 동의를 구한 적 있냐며 자기는 변수 많은 세상에서 아이가 불행할까봐 안 낳는다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그야 다 자기 생각이니 옳고 그를 것이 없는데, 그들은 왜 굳이 아이 낳은 사람이 '나중에 자식 봉양을 기대하려고'같은 이유로 낳는거라며 이기적인 사람이라 우기고 싶어할까 궁금해졌다.
자식으로서의 자기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남도 그러리라 여기는 것도, 자기 자식도 그럴지 모른다 여기는 것도 그저 자기 세계관의 반영일 뿐이다. 그렇게 치면 나 혼자만 편하게 살겠다는 사람도 이기적이라는 논리가 성립하지 않겠나. 그러니 서로 싸움만 한다.
나는 내가 자식을 낳기로 결정해서 낳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연이 있기에 온다고 생각한다. 자식연이 없다면 뭘해도 안 생기고, 있다면 늦게라도 온다. 그렇기에 내 선택이 아니라 하늘이 주는거라 생각한다. 늦둥이 둘째도 그렇게 왔다고 여긴다. 연이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아이다.
삶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 비록 현실적인 문제에 치여 사느라 보기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누가 결혼을 하네 마네 아이를 낳네 마네 하는 말들이 무의미해 보인다. 자기가 결정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세계관이 이렇다보니 결혼이나 출산 여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실제로 미혼인 친구나 지인이 더 많고 말이 안 통한다 여긴 적이 없다. 마음 속에 가르는 생각이 없어서 그렇다. 자녀가 여럿 있어도 자기만 보는 엄마들도 수두룩빽빽하다. 애 키우는 기회를 가져도 못 깨닫는 사람은 평생 그러고 산다.
육아가 사랑을 배우는 가장 난이도 낮은 하지만 또 가장 어렵기도 한 방법인데도 그렇다. 본능적으로 자식을 아끼게 되어 있으니 이타적이고 성숙한 사랑을 배우기 유리하고, 그 와중에 진정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아주는 진짜 사랑을 목표로 해야하니 무척 어렵다. 자식을 독립적인 존재로 바라보기 보다 나의 결핍을 투사하거나 동일시하여 보는 쪽으로 마음이 흐르기 일쑤기 때문니다.
나는 진심으로 육아가 수행이라 여긴다. 옛 수행자들은 남성만이 수행할 수 있고 여성은 불리하다고 하여 배제했는데, 나는 여성이야말로 수행에 적격인 조건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남성이 되려 불리하다. 성욕의 노예인데다 자식에 대한 애착을 진정한 사랑으로 변환할 바탕을 까는 것조차 어렵다. 자기 몸에 품었다 고통스럽게 세상에 내고 젖먹여 키우는 엄마만큼 온몸으로 이타성을 발휘하여 다른 개체를 보듬을 수 있을까? 엄마는 위대하다는 말은 있어도 아빠는 위대하다는 말은 없다. 깜짝 놀라면 엄마야!를 외치지 아빠야를 외치지 않는다. 자식과의 본능적인 친밀감에 있어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그런 면에서 여성이 이타적인 사랑에 더 가까운 경험을 하기 수월해 영적으로 더 깨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종교나 문화가 여신을 핍박했왔다고 본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시기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내 삶이 귀하고 감사하다. 내가 성숙한 사랑을 배울 기회를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배울 기회가 없다고 여기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쪽이 아이를 낳아서라도 사랑을 배워야할만큼 모자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아이 유무와 상관없이 할 수 있다. 숭고한 사랑을 한 소록도의 수녀님들이나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같은 분들은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기에 자녀가 필요없지 않았을까?지난 생에 사랑을 많이 해서 이번 생에는 오롯이 나만 챙겨보려고 삶을 디자인하고 왔을 수도 있지 않나. 우리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기에 존중해야 한다. 고귀한 도덕적 기준때문에 존중해야하는게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내가 아무 것도 모르기에 겸허해질 수 밖에 없고 존중이 절로 배어져 나온다고 믿는다.
말이 샜지만, 어쨌거나 다 자기 길을 가는 것이고 삶의 연이 맺어지는 형태가 다를 뿐인데 왈가왈부할 필요가 뭐 있나 싶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세계관이다. 자기다운 길을 걸으며 희노애락을 느끼고 그 안에서 의미도 찾고 성장도 하며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 감사하며 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세상이 하도 흉흉하여 감사보다는 의심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부정적으로 생각이 흐르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보듬어줄 필요가 있다. 내 선택이 무엇이건간에 장점을 보고 나아갈 때 나도 행복하지 않겠나.
환경을 내가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내가 바꿀 수 있다. 자기 세계관이 어둡다고 다른 사람도 어둡게 사는게 아니다. 반대로 자기가 살만하다고 다른 사람도 살만한 것 또한 아니다. 각자 길이 있고 입장이 있고 그 길 위에 가시밭도 보석도 있다. 그래서 모두 귀하다. 아이를 낳네 안 낳네로 서로 까내릴 이유가 전혀 없이 모두 귀하고 빛나게끔 태어났으며 각자의 삶의 목적이 다르니 훈수를 둘 수도 없다. 인터넷 똥글이라지만 저출산 시대이다보니 가끔 눈에 걸리는 비혼이나 출산 운운 글에 의아해서 나도 또 다른 똥글을 적었다.
굳이 타인에게 자기 세계관에 동의하길 바라며 뭔가를 자꾸 어필할수록 그만큼 그 세계관이 취약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단단한 사람은 굳이 주변에 동의를 구하면서 자기 것이 괜찮은지 확인할 필요가 없다. 동료를 모으려고 애쓰지도, 자기를 위협하는 세계관을 가진 이들을 적대하지도 않는다. 세계관은 나를 보호하는 튼튼한 성벽이면서 동시에 벽돌 빠진 허술한 담장이기도 하다. 그 이중성을 음미하다보면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여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