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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키울 때, 투사와 철회

Feat.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by 율마
투사는 무의식의 내용을
외부로 옮겨놓는 행위다.

철회는 그것이 사실은
자기 안에 있었다는 걸
자각하는 일이다.




아이든 어른이든, 우리는 내면의 Self(전체성, 신성한 중심)를 타인 ― 부모, 연인, 스승, 심지어 자녀 ― 에게 투사함으로써 자기(Self)를 ‘바깥에서’ 만나게 된다.


그 투사를 철회(Withdrawal) 하는 과정이 '의식화'다. 투사가 거두어질 때 비로소 나와 상대를 제대로 만난다.



투사는 인간 관계의 자연스러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타인에게 영혼을 빼앗긴다.



모든 관계에 투사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울처럼 작용한다. 내가 예뻐 보이기도, 미워 보이기도 하는 거울을 보고 있는데 그게 내 모습인 줄을 모르고 상대에게 무어라 한다.


중요하지 않은 관계여도 마음이 불편해지는데, 가족이나 가까운 사이라면 더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가까울수록 유아적 욕구가 일어 '쟤 마음도 나와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한다.

상대가 어떤지 알아보려 하기 보다 내 생각에 좋고 나쁜 것을 기준 삼아 행동하기에 갈등을 피할 수가 없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온갖 설명과 신념이 따라 붙지만, 대부분은 내 두려움이 증폭된 결과나 핑계다.





육아는 투사가 넘실대는 장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나의 이상, 나의 미완성된 가능성”을 투사한다.


<나는 이렇게 자랐지만 애는 다르게 키우겠다>

<나는 이런 점이 힘들었으니 너는 안 그러면 좋겠다>

<나는 이게 좋았으니 너에게도 주겠다>



모두 애정을 기반으로 한 결심이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내 기준일 뿐이라는 것.

이 지점에서 벗어나기가 참 힘들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융분석을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아이를 자기답게 크게(개성화) 돕기 위해 내 개성화의 길로 가기'였다. 융은 부모의 개성화는 자녀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했다.



투사를 철회하는 것은,

“이건 내 욕망이지, 아이의 길이 아니다”를 깨닫는 일이다. 그것이 아무리 옳게 보여도.

어른은 이미 삶의 생존 전략과 방식이 굳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심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옳다고 굳게 믿게 마련이다. 내 좁은 세계에서 경험으로 배웠으니 체화되어 있어 스스로 구멍을 보기 어렵다. 오로지 타인의 반응과 이로 인한 내 마음의 어지러움을 통해 '어라?'하며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책이나 현명한 이들의 멘토링 등등도 있지만, 내가 직접 긁히지 않으면 그저 내 식대로 받아들여 철회보다 투사 강화의 길로 가기 쉽다. 인간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투사를 볼 수 있다. 결국 남탓이 틀렸고 내 탓임을 아는 과정이기에 그 정도 냉철함이 필요하다.



어른이 제 욕망을 철회하면, 그때 아이는 비로소 자기(Self)의 길을 걷는다. 우리 나라 아이들이 특히 힘들어하는 이유는 학업 과열 등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부모와 사회, 집단 무의식의 강렬한 투사로 자기다운 길을 가는 일이 아예 꽉 틀어 막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폰 프란츠는 “진정한 사랑은 투사가 철회된 뒤에도 남아 있는 애정”이라고 했다. 아이가 내 불안을 건드릴 때, 내 것임을 알고 내 맘에 들게 만들려 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애정으로 바라볼 때. 나는 그렇게 아이들을 사랑해주고 싶은데 몹시 어렵다.

​어렵다는 감각이 있어 다행이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는 않았단 뜻이니. 갈 길은 멀지만 더 늦지 않게 아이와 내가 균형 잡고 함께 가는 감각을 익히고 싶다.



어느 세월에.(한숨)




<참고>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Marie-Louise von Franz) ― 셀프(Self) 투사와 철회에 대해.

대표 저작:
Projection and Re-Collection in Jungian Psychology (1980)

The Psychological Meaning of Redemption Motifs in Fairytales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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