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Apr
저보다 열 살이 어린 사촌동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즈음에, 어머니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게 아버지 흉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너랑 너 동생 어렸을 때는 애들이랑 잘 놀아주지도 않더니, 이모가 잠시 맡겨 놓은 사촌 동생과는 놀이터에서 한 시간씩 놀아주고 들어온다고. 너희 아버지가 이제 나이를 먹었나 보더라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멋쩍으셨는지 내가 그랬었나 하고 껄껄 웃고 마셨습니다. 어렸던 사촌동생이 이제 대학 갈 나이가 되었으니 10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서른을 앞두고 있고 아버지도 조금 있으면 환갑을 맞겠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듯 아버지는 그동안 더 많이 변하셨습니다. 페이스톡으로 들은 가장 최근의 아버지 흉은 이렇습니다. 드라마를 부쩍 자주 시청하시는 아버지가 요즘은 드라마 캐릭터들이 뱉는 대사에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고. 나중에 남들 앞에서도 그러면 어떨까 창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스마트폰 각도를 틀어 옆에 앉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쑥스러우신지 껄껄 웃고 저는 그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껄껄 웃습니다.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더 많이 분비된다는 여성호르몬 때문이겠지요.
10년 동안 나이를 먹어가며 변화한 것은 아버지뿐만이 아닙니다. 이십 대 초반부터 이십 대의 중간 지점까지 저는 울었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연인과의 이 별라던지 취업 스트레스처럼 그 나이 즈음이면 족히 울 법한 일들이 없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럴 때에도 울컥- 하기만 했을 뿐 눈물을 보인적은 없습니다. 남들 없는 곳에서 욕을 한 바가지 뱉는 것으로 감정 해소를 갈음했던 듯합니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음악과 교감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을 어떻게든 울리겠다는 틀에 박힌 (한국식) 신파에는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끼었고, 자연스러운 감동을 주었던 좋은 영화들을 보면서도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었습니다. 별 이유도 없이 말입니다. 이런 냉혈함에 예외가 되었던 두 작품이 있었는데, 하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였고 다른 하나는 [나의 아저씨]였습니다. 첫 번째 영화를 보며 울었던 것은 이렇게 슬플 줄 모르고 보았던 영화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너무도 훌륭한 작품이기에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높고 단단하던 마음의 외벽도 이십 대 후반이 되자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말랑말랑해져 버림을 발견합니다. 고작 3~4년 전과 비교해보면 정말 심각한 수준입니다. 요즘은 교감하는 데 있어 기승전결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시상대에 선 올림픽 선수들의 눈물만 봐도 가슴 한편이 폭신해져 버립니다. 아카데미 상을 받는 배우들의 수상소감을 듣기 전 눈물 어린 모습만 봐도 입술을 조금 더 세게 다물어야 합니다.
오늘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CODA](Children of Deaf Adults)를 보러 가서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몇 번씩이나 참아 내고 왔습니다. 농인 부모와 오빠 그리고 그렇지 않은 딸의 유대를 그리는 영화는 어떤 장면에서 모든 청각 출력을 멈추고 침묵 속에서 이야기를 그려나갑니다. 마치 농인이 일상을 마주하듯이 말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제 가파른 들숨과 날숨을 들으며 저는 제가 얼마나 격렬히 영화와 교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옆에 누군가 앉아있었다면 미안했을 정도로 말이죠. 충분히 창피해했을 법도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CODA] 역시 매우 훌륭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는 퀴퀴한 말을 떠올려봤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태어나서' 까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딱 세 번 우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오늘 아버지의 변화와 제 변화의 속도를 돌이켜 보며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 아버지 나이가 되면 저는 눈물 연기 전문 배우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