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와 고용 (下) - 完 , 23-MAR
2023-03
죽음은 때때로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만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까지, 태아로서, 알로서 혹은 유아로서 길고 짧은 준비 기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 새로운 삶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인터뷰를 잘 마친 것을 축하한다는 이메일과 함께, 며칠에 걸쳐 CEO와 면담을 갖자는 연락과 레퍼런스 체크(평판 조회)를 위해 지난 회사의 상사의 연락처를 묻는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늦은 밤, 지난 회사의 매니저에게 레퍼런스 체크를 위한 통화를 잘 마쳤다는 메시지를 받은 이후로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실업자로서 보냈던 21일 차 아침에는 마침내 기다리던 오퍼 레터를 받았습니다. 해고를 기다리던 3주, 그리고 실직자로 보냈던 3주, 총 6주 만에 얻은 평화. 전화로 감사를 전하고, 몇몇 사항에 대해 협상을 거친 뒤 오퍼에 사인하며 드디어 나의 롱 바케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간절히 바랐듯이 방에서 [환생]을 틀고 눈을 감았지만 기대했던 안도감과 행복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점은 내가 예상하던 지점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삶은 오퍼 레터를 받기 훨씬 전, 죽음을 마주하고 그에 독립적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던 순간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요?
Sweet Life.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 기대했던 안도감과 행복감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내가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절절히 체감합니다. 자유의 달콤함은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에 깃듭니다.
이제 다른 이들과 대화함에 있어 조건문을 달지 않아도 됩니다. 지난 몇 주간 나의 약속들은 '이번 일이 잘 끝나면...'이라는 접두사를 따라야만 했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중에 밥 한 번 먹자는 가벼운 인사도 쉽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고마웠던 이들에게 무조건적인 감사 인사를 보내며 내가 얻게 된 달콤함을 다시 한번 만끽합니다.
조금 더 쉽게 어깨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해고를 기다리던 3주, 무소식이 희소식이던 시간을 보내며, 작은 좋은 일들에도 춤을 출 수 있는 가벼움과 대담함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앞으로 조금 더 자주 즐겁고 싶습니다. 오늘 점심으로 먹은 샌드위치가 맛있어도 어깨를 흔들며 춤을 춥니다. 앞에 앉은 사람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해도 그리 상관없습니다.
앞에 앉은 사람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회사에서 잘린 것도, 지인들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도움을 청하는 것도 그다지 멋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애착이 가는 상대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더 절대적인 가치들 앞에서 남들의 시선과 부끄러움, 그리고 자존심과 같은 것들은 덧없는 감정에 불과함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벗어 놓으며 나의 마음이 한층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려운 상황들에 처했을 때 스스로에게 자주 그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금번의 롱 바케가 아쉬운 마무리를 지었다면, 저는 이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마음을 달랬을 것입니다. 운 좋게도 다른 종착지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 결과를 삶의 대단한 전환점으로 여기고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위와 같은 계기들은 쉽게 오지 않고, 어떠한 상황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때때로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금번의 새로운 삶도 언젠가는 예기치 못한 끝이 다가올 수도 있음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잠시 미루어 둡니다. 조금 더 즐겁게 살기로 다짐했기에, 아직은 새로운 삶과 자유를 만끽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죽음이 찾아오면 이 또한 슬기롭게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소회로 이번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너무도 기쁩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마음껏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 부디 키스를 보내주십시오. 저도 마음으로부터 키스를 보냅니다.”
- 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