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스타트업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방송된다는 말을 듣고 처음 내 머릿속에서는 뻔한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도전, 성장.. 팀 내 갈등.. 뭐 그런 내용들을 그린 드라마겠지, 기대보다는 보면 괜히 현실과의 괴리감에 실망만 들 것 같아 궁금하면서도 굳이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말 내 예상을 많이 깨고, 이틀 만에 정주행 해버렸다. 내 기준에서는 정말 잘 만들어진 드라마다. 개발자의 시선에서, 기획자의 시선에서, 투자자의 시선에서, 혹은 기술로부터 도태된 이들의 시선까지,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의 관점과 상황을 잘 그려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적인 요소를 배제하고도 실제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정말 현실에서 있는 여러 문제들, 특히 투자자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이 정말 현실적으로, 다각도로 그려져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스타트업과 관련된 용어를 드라마의 스토리와도 같이 연관 지어 흥미진진한 전개를 기획한 시나리오 작가도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보면 볼수록 정말 사소한 부분까지 많은 신경을 쓴 것이 보였다.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그로 인해 혜택을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동시에 일자리를 잃고 도태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도, 우리가 기술에만 미쳐 간과할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는 부분이 참 좋았다.
그러나 인재컴퍼니가 개발한 인공지능 기술로 인해 생계에 위협을 받는 이들의 문제가 단순히 “도산이 아버지의 투쟁”만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참 어렵다는 사실이 드라마에서는 감동의 한 장면으로 넘어간 점이 조금 아쉬웠다. 드라마의 한계도 분명 있겠지만 사실 드라마 속 잠깐의 울림으로 끝나서는 안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 드라마를 쭉 보면서 무엇보다 ‘사람’에 많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참 좋았다. 모든 일의 시초가 된 한 ‘사람’, 여러 시련과 역경을 겪지만 함께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끈질기게 나아가는 ‘사람들’, 질투 혹은 복수심을 불태우게 했지만 결국 그 사람을 한층 성숙하게 한 ‘사람’.. 각각이 다른 사람이지만 결국은 그 서로가 없었다면 무엇도 시작되지 않았고, 끝맺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교훈이 매 화에 조금씩 녹아져 있는 듯했다.
아마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방방곡곡 쏘다니던 과거의 내가 자꾸 생각이 나서 그랬을까, 일분일초를 놓칠세라 나도 모르게 열심히 봤던 것 같다.
3년 전, 감사한 기회로 실리콘밸리에 무작정 가서 수많은 경험들을 했던 그 시절. 시리즈 A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네트워킹이란 네트워킹은 다 참여하며 만나는 모든 이들과 악수하며 당당하게 명함을 건넸던. 그들이 하는 알듯 말듯한 어려운 기술 이야기에도 눈을 빛내며 끄덕이며 집에 돌아가 열심히 찾아보던 그 시절..
무모하면서 당당한 내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창업을 위한 창업”을 꿈꿨던 것 같다. 나의 소명보다는, 남들의 시선을 가지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기에, 그 열정은 뜨겁게 불타오르다가도 쉽게 식기도 했다. 삼산텍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나 역시 처음 내 가슴을 뛰게 한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바로 어디에 있든지, 내 가슴이 뛰는 무언가를 향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곳에서의 인연과 내가 경험한 것들이 한국에 돌아온 나를 한층 성숙하게 만들어갔다.
날씨도, 열정도 가장 뜨거웠던 17, 18년도 여름, 실리콘밸리에서 함께했던 멤버들과 했던 또 한 번의 도전.
저 때 우리도 시각장애인용 서비스를 주제로 했었는데.. 상금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다들 질세라 밤을 새웠지.
-
여러 위기와 시련의 순간들을 거치며 한층 성장한 삼산텍 팀원들처럼,
실패도 있었고 성공도 있었던 과거의 시간들이 지금의 또 다른 꿈을 향해 나아가는 나를 만든 것 같다.
마지막화에 등장한, 삼산텍이 처음 시작된 옥탑방에 다시 들러 과거를 회상하며,
철산이가 한 말이 가슴을 참 울렸다.
“그리워서 울었다, 그리워서. 이 쪄 죽을 옥탑에서 지낸 그 시절의 우리가 좋고, 그리워서.”
3년 전의 내가 문득문득 떠올라 미소 지어질 때가 있다.
그때의 내가 참 좋았던건 분명하다:)
삼산텍 멤버들처럼, 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도 분명 다르지만,
좋아하는 일이라면, 같은 비전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동료가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그걸 백번 선택할 것이라는,
이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