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여러 가지 모습
[아주르와 아스마르]는 프랑스의 미셸 오슬로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다. 민족과 태생이 다른 두 소년 '아주르와 아스마르'가, 마그레브* 지역 출신의 여성 '제난'을 각각 엄마와 유모로 두고 형제처럼 자라나, 성인이 된 뒤 그들이 어린 시절 공유했던 이야기 속 주인공(요정 진)을 찾기 위한 모험담이다.
* 마그레브 : 아프리카 대륙 북서쪽 국가들의 그룹을 지칭.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리비아, 모리타니 등. 아랍어 사용, 이슬람교 (수니파),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
감독은 [아주르와 아스마르]에서 매우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는데, 때로는 특정 종교나 문화, 언어권에서만 드러나는 특수성, 지역색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관통하는 큰 주제는 서로의 차이를 차별이 아닌 화합으로 이끌어 가자는 메시지일 것이다.
아주르와 아스마르는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다. 아주르는 피부색이 다른 유모가 키우는데, 말하자면 다문화 가정, 한부모 가정에 대한 소재를 사용한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두 가지 언어(프랑스어, 마그레브어)를 사용하고, 두 가지 문화와 종교(동서양, 이슬람교와 기독교)에 익숙하게 된다.
배경은 중세 프랑스로 추측되는데, 감독은 16세기 페르시안 복식과 페르시아, 오스만, 마그레브의 건축과 미술 이스탄불 블루모스크(성 소피아 성당의 영향)등을 모티브로 사용했으며, 현재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의 건축물 또한 참고했다고 한다.
감독의 전작들도 살펴볼 만하다. 그림자극의 형식을 차용한 [프린스 앤 프린세스], [밤의 이야기]에서는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의 영상으로 만들어냈고, [키리쿠, 키리쿠], [키리쿠와 마녀] 등에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재치 있고 아름답게 표현해낸다. 감독은 1943년생으로, 2018년 현재까지도 꾸준히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른 남성, 게다가 자신의 형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여성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매우 신사적으로 그 뜻을 전달하는 아주르의 모습은, 요즘처럼 데이트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보았을 때 너무나 동화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또한, 아주르와 아스마르 사이에서 고민하는 요정 진에게 샴수사바 공주는 아주르와 아스마르 둘 다와 결혼하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들었던 제난의 이야기 속에서, 요정 진이 결혼할 사람이 당연히 한 명일 것이라고 누가 말했는지 생각해보자. 누구도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다. 마지막 선택의 순간, 두 명과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요정 진 본인이다.
여전히 몇몇 국가들은 지금까지도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있다. 일처다부제가 가능한 국가도 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은 이 일부일처제의 국가권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비상식적인 일로 느껴질지 모른다. 영화 [아주르와 아스마르]의 배경인 마그레브 지역은 이슬람교이므로, 이 내용에 국한해서 생각해보자면, 종교적인 이유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고 여자의 경우는 다수의 남편을 맞이할 수 없다. 그 여성이 권력을 가진 공주거나 심지어 요정이라도 말이다. 이런 암묵적 룰을 지향하는 사회와 문화는 그러한 지침과 기반을 만들어낸 주류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억압으로 다가오며,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시스템에서 배제되고 제외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가 된다. 약자들은 스스로 그러한 사실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하거나,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도 한다. 때로는 권력의 불균형을 깨기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더라도, 그곳에는 사실 보이지 않은 억압이 존재할 수 있다. 어쩌면 성별이 여성으로 나타나는 요정 진이 왕자가 나타나 구해줄 때까지 오랜 시간 갇혀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전통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러한 뿌리 깊은 종교적, 문화적 억압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미셸 오슬로 감독은, 수많은 식민지를 가진 역사를 지닌 프랑스 출신의 서양인이고 성별은 남성이다. 그의 시각으로 본 아프리카는 당연히 식민지배를 받았던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 온전히 이해받는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전해오는 옛날이야기라는 서사 안에서 나타나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비트는 것 역시, 여성의 시선에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남성 중심의 서사로만 느껴질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이만큼 생각하고 고된 애니메이션 창작 노동을 하여 아름다운 작품 속에 언급해준 일 자체로 고마운 일일지 모르나, 감상 주체에 따라 서양인 남성의 시혜적 시선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정도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작품, 무해한 작품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전쟁과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가해자였던 이들의 사과와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과거의 잘못과 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아름다우면서도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해대는 애니메이션도 세상에는 많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품을 통해 적극적인 해명과 구체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라고 눙치는 느낌이 없잖아 있음에도, 꽤 신중한 작품이라고 느껴진다.
내가 아닌 존재(성별이 다르거나 피부색이 다르거나 장애가 있거나 가난하거나 어린 사람, 심지어 짐승이나 때론 곤충일지라도)의 다름과 차이를 알되 차별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하는 모습을 미셸 오슬로 감독은 항상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