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ibooks Jun 26. 2018

[여중생A]

거칠지만 따뜻한 당신의 손 위

당신을 위로하는 것

언제부터인가, 말로 하는 위로라는 것을 섣불리 하지 못하게 되었다. 위로라던가 배려라던가 라는 명목이래 오히려 해서는 안될, 상대를 상처 입히는 말을 하거나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다고 해서, 말이 서툰 사람이 위로의 말인들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위로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하고, 배려란 상대방의 입장이 온전히 되어보지 않으면 힘든 법이다. 말로 하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사실 위로란 말이 필요 없는 일이기도 하고, 상대를 안심시키는 상황을 제공하는 일이거나 사소한 행동이 되기도 한다.


중학생인 미래(김환희)에게 위로는 현실 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 나이 또래가 의지하는 친구나 가족은 오히려 미래를 힘들게 하는 존재였다. 

중3 때 미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나는 돌봐줄 가족도 있었고 경제적 상황은 훨씬 나았지만,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또래는 늘 불편했다. 어떤 친구가 나와 친해지려고 하면 잘 알지도 못하며 접근하는 것 같아 거리를 두었다. 어른들이 하는 일들은 다 못 미더웠다. 왜 굳이 체육시간에는 짝을 지어서 운동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일을 시키는 어른이나, 그게 뭐라고 꼭 친구와 짝을 지으려는 아이들이나 모두 이상해 보였다. 체육시간에 짝을 짓거나 밥을 같이 먹기 위해 친구를 만드는 것 같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생리혈이 새어 나온 것으로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도 이상했다. 매사의 모든 상황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는 시험을 치르는 느낌이었고, 그런 사람들의 잣대가  항상 별 위안이나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허무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욕심도 의욕이 없던 시기로 기억한다. 소위 중2병이라고 일컫는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에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로 많이도 현실도피를 했었다. 

현실이 버거운 미래가 의지하는 것은 소설 쓰기와 게임, 두 가지였다. 



미래의 게임

미래에게 게임이라는 가상의 공간과 게임 속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안정감, 그 안에서 만나곤 하는 랜선 친구들이 있었다. 이 게임과 환상은 나중에 미래를 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사실, 영화 [여중생A]를 보는 내내, 나도 중학생 시절에 저런 게임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분명히 의지가 되었을 것이고 빠져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마침 많이 지치고 힘든 시기를 보낸 최근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반드시 게임은 아니라도, 커다란 손을 가진 거인이 사람을 씻기고 입히고 거두어 먹이고 돌보아주고 예뻐해 주면 어떨까. 가끔 힘들 땐 부잣집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부러워지는 적도 있고 그런 법이니까.

요즘 청소년기의 학생들을 만날 일이 꾸준히 있는데, 그들이 게임에 의지하거나, 소위 현질, 덕질을 하는 현실을 나는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일이 나쁘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이 없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모르는 일,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없는 상황이 위험하고 서글픈 게 아닐까 생각한다. 게다가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무엇이든, 그 힘든 시기를 잘 견디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면서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다.



미래와 난 화분과 달리기

미래를 절대로 대놓고 다그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믿어주지도 않고, 은근히 사람 무시해가며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담임 선생님(이종혁)이 애지중지하는 난 화분이 있다. 생물이긴 하지만 사람은 아닌데 비중이 과하다 했다. 담임에 대한 짜증은 관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난데없이 미래가 그 화분을 들고뛰기 시작했다. 

아마 학생들에게 덧입혀진 수많은 이미지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들, 비싼 화초처럼 얌전히, 보기 좋게, 화분 안에서, 자신의 생각처럼 자라길 바라는 어른들의 기대를 안고 미래는 용감하게 뛰어내린(떨어져 버린) 것이다. 난이 어떤 상징이든 간에, 화초는 날아오르고, 화분은 깨어진다. 미래도 떨어진다. 그러나 다치지 않는다. 미래의 소설 속에서는 아무도 다치지 않기 때문이다.



화해와 위로

가장 나약해져 있는 시기에 받은 손길은 오래도록 기억 남는다. 어떤 의도가 있었을지언정 모른 체 실수로 눙쳐주는 일은, 제대로 위로를 받아본 사람만이 구사하는 기술이다. 서로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상처는 결국 모두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킨다. 어쩌면 친구라는 이름, 우정이라는 상태에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있다. 애정, 질투, 동경하거나 무시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 동시에 또는 순차적으로 떠오르거나 가라앉거나 한다. 우리가 그런 모순과 다중적인 감정들을 버거워하는 것도, 이런 감정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도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이미 더 이상 서비스되지 않는 게임처럼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취미조차,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 전부인 희망이 되고, 슬픔으로부터 구원한다. 그런 시시해 보이는 일들로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낸 후에, 비로소 그 뒤에 있어주던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바로 지독한 성장통은 끝이 난다.

그렇게나 감정표현이 미미하던 미래가, 영화의 끝부분에서 그렇게나 격하게 울던 장면에서 읽던, 희나의 편지 내용이 기억난다. 마치 '나는 슬플 땐 힙합을 춰'처럼 너무 만화 같은 대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웹툰이 원작이고, 우리는 웹툰과 영화와 게임을 좋아해도 괜찮은 사람들이고, 이 영화의 전제가 그 모든 것을 허용하므로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는 펑펑 울지는 못했지만, 이 희나의 편지는 아마 문장 끝에 달린 하트 하나까지도, 그 어느 누군가에게는 항상 좋은 문장일 것이라 생각한다.


슬플 땐 울어도 괜찮아 -희나♡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제공받은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주르와 아스마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