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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e Kim Sep 18. 2016

몰레, 검고 질척한 소스가 부어진 닭고기 맛에 대하여

 멕시코 시티의 주방

더위를 피해 사람들이 떠나고 바글거리던 도시가 텅 비는 뉴욕의 여름이 되자, 나도 다시 짐을 쌌다. 


그리고 멕시코 시티에서의 두 달이 시작되었다. 

멕시코 두 번째 여행, 이번 여행은 배낭을 메고 아름다운 해변과 원주민이 사는 산골 마을을 찾아다니는 대신, 멕시코 시티에서 진득하게 '살아보는' 여행이다. 나는 호텔 대신 내 또래의 멕시코인 후안 부부가 사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작은 방 하나를 빌렸고, 아침이 되면 공원이나 시장을 어슬렁거리는 대신 허둥지둥 근처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는 그런 일상을 보내게 될 것이다. 집 근처의 시장에 단골 야채가게를 만들고, 주중에는 주말의 늦잠을 기다리는 그런 일상을 사는 여행.



도착하자마자 임대한 집의 주방 스펙을 파악한 후 제일 먼저 시도하기로 한 음식은 바로 검은 몰레(Mole negro)였다. 가장 생경하고 손이 많이 갈 것 같은 이 요리를 만들어보고 나면, 앞으로 멕시코에서 만나게 될 그 어떤 낯선 재료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초콜릿과 온갖 종류의 견과류, 다양한 종류의 말린 고추들, 바나나, 각종 향신료를 넣고 만드는 이 검은색 질척한 소스. 고대어로 몰레는 말 그대로 '섞다'라는 뜻으로, 현재는 이것저것을 섞어 갈아 소스를 부은 음식을 몰레라고 부른다. 

그냥 섞어서 만든 음식, 검은 몰레

난 몰레의 탄생 스토리를 무척 좋아한다. 식민지 시절에 한 수도원에 대주교가 방문하기로 했는데, 가난한 형편에 이렇다 내놓을 음식이 없었던 수녀가 주방에 있던 변변치 않은 재료들을 섞어 소스를 만들고, 마당의 늙은 칠면조를 잡아 그 위에 부어 내었다고 한다. 난생처음 맛보는 요리의 맛에 감탄한 대주교가 요리의 이름을 묻자, 수녀는 "그냥 섞어서 만든 거예요. (I made mole)"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멕시코 퀴진을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인 몰레는 그렇게 겸허하게 탄생하였다. 


한 멕시칸 친구는 이 이국적인 몰레 소스를 만드는 방법은 지역, 가정마다 무척이나 다양해서, 조리법에 따라서 어떤 몰레에는 65가지 재료가 들어가기도 한다며 자랑이 섞인 너스레를 떨었다. 집이나 지역에 따라 들어가는 액젓이나 재료가 약간씩 다른 김치처럼 아마 집집마다 나름의 비밀 재료가 있는 것 같았다.



검고 질척한 소스, 검은 몰레의 맛


2년 전 처음 오하카(Oxaca)에서 오하칸 몰레를 맛보았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멕시코의 남부 마을 오하카 중앙 재래시장의 한 귀퉁이, 가장 유서 깊어 보이는(?) 간이식당을 골라 앉았다. (보통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앉아 있는 곳, 식사하는 사람들과 주인장과의 친밀도 등을 꼼꼼히 조사한 후 선정한다) 식당 카운터에 나란히 놓인 진흙으로 만든 테라코타 도자기 솥들이 뭉글게 끓으며 미온의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늘의 성스러운 점심 한 끼 식사를 믿고 맡기기로 결정한 이 듬직해 보이는 식당 아주머니는 그 커다란 도자기 솥에서 검고 미지근한 검은 소스를 한 국자를 퍼, 닭다리 한 조각에 철푸덕 부어 올렸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태국의 맛 그대로를 재현해낸다는 (심지어 식기까지도) 원조 팟타이를 서울 한복판에서 먹을 수 있는 이 인터네셔널한 세상에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만나는 말 그대로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강한 멕시코산 시나몬 향이 나는 이 미온의 초콜릿 소스를 대체 무슨 음식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수상한 검은 소스는 짭짤하고, 약간 달착지근하고, 조금 맵기까지 했다. 그리고 씁쓸한 뒷맛이 다음 수저를 뜨기 전까지 입안을 맴돌았다. 그리고 이후 오하카에 머무른 일주일은, 그야말로 몰레의 향연이었다. 시장 내 이 식당 저 식당의 몰레 맛을 비교해보며, 이 식사인지 디저트인지 헷갈리는 질척한 소스를 마음껏 먹었었다.



낯선 나라 시장에서 단골 가게를 만드는 일

재료를 공수하기 위해, 일단 집 근처 메르세드(Merced) 도매 시장으로 향했다. 먼저 고추 전문 상가가 늘어선 구불구불 미로 같은 골목을 찾아, 이집저집 어슬렁거리며 재료의 품질과 가격을 살폈다. 시장을 세 바퀴쯤 돌고 함께 간 짝꿍이 다리를 부여잡을 때쯤에, 나는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씩씩한 젊은 청년을 찾아냈다. 김정은의 정치 방식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핵 문제에 대해 가벼운 토론을 마치고서, 우리는 멕시코의 다양한 마른 고추의 종류와 사용법, 그리고 최상품 마른 고추를 고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봐, 이렇게 꼭지가 부서진 것은 안 돼. 고추의 종류에 따라서 고추의 색깔과 형태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훈제된 치포틀레(Chipotle)는 이런 일정한 색깔을 띠는 게 좋은 거야." 


최소 1/4 킬로그램을 사야 한다는 도매 가게의 룰을 깨고 이런저런 말린 고추와 훈제 고추 등을 조금씩 다양하게 사는 외국인의 특혜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단골 고추 가게를 만드는 데 절반쯤 성공한 것 같았다.



몰레를 만들면서 가장 난감했던 것은 목표 기준으로 삼을 몰레의 '진정한 맛'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시장통 간이식당, 하얀 셔츠를 차려입은 웨이터가 물을 따라주는 고급 식당, 룸메이트의 어머니가 시골에서 만들어다 준 엄마표 몰레 등. 이런저런 몰레를 먹어봤지만, 내가 먹어본 모든 몰레는 이렇다 할 기준을 세우기 어려운 각기 다른 맛이었다. 어떤 몰레는 달큼하며 그 뭉툭한 맛이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고, 또 어떤 몰레는 입안에 넣자마자 얼굴이 찌푸려질 만큼 씁쓸하기도 했다.   



후안 어머니의 레시피


같이 사는 후안이 어머니에게 부탁해 가족 몰레 레시피를 전해 받았다. (아, 물론 그녀의 몰레는 겨우 26가지 재료가 들어간 '소박한' 조리법이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고추와 견과류 등 채소를 제외한 모든 재료를 불에 살짝 볶아, 재료 속에 잠든 향을 깨우는 일이었다. 멕시코 친구가 대가족이라는 것을 깜빡하고 한 들통 분량의 몰레를 만드는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내가 받은 레시피는 대가족이 먹고도 남겨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다음 과정은 대체로 간단했다. 모든 재료를 믹서기 혹은 절구에 갈고 닭 육수를 넣어 뭉근히 끓여내는 것. 


장장 세 시간에 걸쳐 요리를 마쳐놓고도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 까닭이 없어 고민하고 있자니, 룸메이트가 내게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해준다. "몰레에는 정해진 맛이 없어. 지역마다 가정마다 조리법이 다르니, 그 어떤 맛도 틀릴 수 없는 거야. You just made your self a little Korean mole." 나를 격려하려 해준 말인지 내가 만든 몰레가 멕시칸 방식과 다르다는 것인지 약간 헷갈리긴 했지만, 저녁 식사에 초대한 집주인 가족이 접시를 모두 비우는 것을 보고 남몰래 기뻐했다. 



한 솥 끓여놓은 검은 몰레를 일주일에 걸쳐 먹어치우고 그다음으로 만든 요리는, 초콜릿 대신 각종 야채와 호박씨를 넣고 만든 초록 몰레(Mole verde)였다. 시장에서 잔뜩 사 온 처음 보는 고추들로 빨갛고 푸른 살사(Salsa)도 만들어 곁들였다. 그리고 집 앞 또띠아리아에서 사 온 따끈한 또띠야에 싸고, 말고, 찍어서 먹었다. 같이 사는 멕시칸 가족에게 저녁 식사를 청할 때마다 그들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곧 내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너희를 초대해야 할 것 같아.


몰레 베르데(Mole verde)와 살사 베르데(Salsa verde), 그리고 선인장 또띠야


집에서 요리할 시간이 없을 때에는, 집 앞 시장의 세비체(Ceviche:해물을 익히지 않고 레몬에 절인 음식)와 생선 구이 등 해물을 전문으로 파는 할머니네 식당으로 달려갔다. 빠에야, 생선구이 등 요일별로 그날의 특선 요리를 준비하는 할머니네 식당은 늘 사람들로 붐볐지만, 우리는 언제나 첫 손님이었다. 멕시코 사람들은 뭐 바쁠 것 있냐는 듯 3~4시가 되어야 점심을 들기 시작했고 보통 식사는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멕시코의 시간은 내가 온 세계의 그것보다 훨씬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을 들락거리는 집 앞 시장은 주중 주말 없이 늘 활기가 넘쳤고, 토마토 한 봉다리를 사도 잊지 않고 덤을 넣어 주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처음 보는 푸성귀를 뒤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라치면, 주인장 아주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이런저런 레시피를 읊어주기도 했다.


아주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이대로라면 이 도시에 마음을 홀딱 뺏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나는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시장에서 미처 다 사지 못하고 두고 온 저 많은 종류의 고추들과 처음 보는 식재료들을 하나하나 다듬고 요리해보려면 두 달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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