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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e Kim Oct 14. 2016

멕시코: 에스페란사 할머니의 부엌

우리에게 음식이 기억되는 방식

멕시코의 집밥

골목골목마다 발에 차이게 널린 길거리 타코를 모조리 다 먹어봐야 한다는 조급함도, 멕시코에서의 체류 기간이 길어져감에 따라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버전의 타코를 먹는 것이 조금은 무료해졌을 때 즈음, 멕시코 친구의 지인 할머니가 친구네 집에 들러 요리를 해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멕시교 근교에 사는 에스페란사 할머니는 이 주일에 한 번씩 멕시코 시티에 올라오셔서 친구가 먹을 음식을 잔뜩 마련해 주시고 간다고 했다. 나는 기회를 놓칠 세라 냉큼 어시스턴트 쿡을 자청했다.


분식집의 김밥, 떡볶이, 달달한 제육볶음도 물론 맛있는 한 끼이지만, 특별한 재료 없이 구수한 집 된장으로 끓인 된장국이나, 취나물 혹은 호박 나물처럼 집에서 해 먹는 삼삼한 반찬 같은 것... 그런 것들이 그리웠다. 식당 메뉴판에는 잘 올라가지 않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음식으로 차려진 집 밥상.


에스페란사 할머니는 그다지 말수가 많지 않으셨지만, 단박에 결혼은 했는지 아기는 있는지 여부를 물으며 요리를 시작하셨다. 마치 그게 통성명 혹은 오늘의 날씨를 묻는 것인냥 너무나 당연하게.



선인장 반찬 (Ensalada de nopales)

척박하고 거친 멕시코의 땅에서 아주 잘 자라는 선인장은 이곳에서 흔하게 먹는 야채 중 하나이다. 이 선인장 샐러드는 메인 요리에 곁들여 반찬으로 주로 먹는다. 깍둑 썰기한 선인장을 소금물에 데쳐내 선인장 특유의 진득한 점성을 덜어낸 후, 할머니의 이가 빠진 오래된 테라코타 솥에 옥수수, 크림, 코티하(Cotija) 치즈를 넣고 살짝 볶는다.


칠레 레예노 (Chile relleno)

달큼한 뽀블라노 고추(Poblano: 피망과 비슷한 종류로, 피망보다 약간 더 질기고 매콤하다)를 불에 훈제한다. 겉면이 고루 까맣게 될 때까지 훈제한 후, 면포나 비닐봉지에 넣고 10~15분간 덮어 둔다. 일명, 고추 땀 빼기(Sweating) 과정. 그렇게 땀을 한 김 빼고 나면 땀을 흘리고 난 고추의 껍질이 스르르 쉽게 벗겨진다. 그렇게 스모크 향이 근사하게 벤 고추 안에 치즈 또는 볶은 고기를 채운 후 계란을 휘저어 거품 낸 계란물을 입혀 튀겨내면 칠리 레예노가 완성된다.


뽀블라노 고추 훈제하기                                                       집에서 만들어 본 칠레 레예노


뽀솔레(Pozole) 수프

우리나라 닭개장 격의 포졸레는 닭과 호미니 옥수수(Hominy: 알이 두꺼운 옥수수의 한 종류), 구아히요 고추(Guajillo), 양파, 마늘 등을 압력솥에 넣고 푹 고아낸 수프이다. 들어가는 재료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지만, 뽀솔레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멕시코 사람들에게 물을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손에 꼽는 컴포트 푸드 (comport food)이다.


점심으로 먹은 뽀솔레 수프


우리에게 음식이 기억되는 방식

사람들은 이 뽀솔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추억이 담긴 이런저런 이야기를 선물처럼 곁들이곤 했다. 어릴 적 엄마가 생일 때마다 원하는 요리를 해주셨는데 자기는 늘 뽀솔레를 선택했다거나, 자기네 집 뽀솔레는 보통 뽀솔레와 다르게 국물이 빨갛지 않고 초록색이라는 둥의 묻지 않은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만의 맛깔난 조리법을 설명할라치면, 그들의 얼굴엔 늘 어쩔 줄 모르겠는 그리움 혹은 행복함이 묻어났다.


할머니는 잰 손길로 양파를 다듬고 마늘을 썰으셨다. 한쪽에서 선인장이 데쳐지는 동안엔 다른 한쪽에서 잽싸게 고추가 익어갔다. 허투로 낭비되는 동작은 한 개도 없었다. 그리고, 서너 시간 만에 주방은 왁자지껄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아보도 데 카르네(고추 소스에 재워 양념을 한 고기 요리), 파스텔 베두라스(시금치, 근대 등 야채가 잔뜩 들어간 계란 치즈 요리)까지 만들기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늦은 점심으로 뽀솔레를 함께 들었다. 할머니는 내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손사래를 두 번이나 치고 나서도, 꽉 찬 국자를 두 번이나 더 담고 나서야 대접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빨갛게 양념된 닭 육수에 채 썰은 생 양상추와 빨간 무, 아보카도를 얹고, 말린 오레가노 허브와 라임 주스도 욕심을 부려가며 뿌렸다. 물론 튀긴 돼지껍질과 또르띠야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서 수저를 들고 싶은 급한 마음을 들킬까 초초한 마음으로, 모두가 순서를 돌아가며 고명을 얹는 의식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요 이- 땅.

모두가 수저를 들자, 코를 찌르는 매콤한 아보도 양념 소스와 뿌연 고추로 가득 찬 들뜬 주방이 순식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정막이 흘렀다. 수저가 대접에 달그락달그락 부딪히는 소리와, 간혹 들리는 "맛있다"는 중얼거림 외에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잠시 보류했다. 그렇게 조용히 모두가 각자의 대접을 비우는 일에 집중했다. 과연 일품의 고기 수프였다. 수프에 담근 돼지껍질 튀김의 진득한 기름이 바알간 닭 육수에 사르르 녹아들어 국물을 한결 더 깊고 걸쭉한 농도로 만들었고, 쫀득하게 씹히는 호미니 옥수수 알과 압력솥에서 적당히 풀어진 부드러운 닭고기는 입안에서 근사한 조화를 이루었다. 아니 어쩌면, 몇 시간을 공들여 대접을 채운 할머니 육수의 깊은 맛의 비결은 그저 그 시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훗날 누군가 좋아하는 멕시코 요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신이 나서 떠들어 댈 뽀솔레에 얽힌 작은 추억이 나에게도 그날 그렇게 하나 생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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