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평소에 이 말을 맹신하는 편이다.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늘 궁금해한다.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을 때는 그게 허무맹랑해 보여도 ‘왜’에 대한 나만의 대답을 만들어내는 버릇까지 생겼다. 그런데 살면서 이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엄마의 죽음
의사들이 엄마의 병은 찾아줬지만 나는 엄마가 병에 걸린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엄마가 고통받으며 죽음으로 걸어가는 그 과정을 납득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인 사람도 멀쩡하게 살아가는데, 큰 죄 없이 살아온 엄마에게 하늘이 말도 안 되는 단죄를 내린 느낌이었다. 게다가 엄마가 떠난 후 남은 사람들의 삶이 생각보다 크게 뒤흔들렸고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더 간절히 찾아 헤맸다. 엄마 죽음 이후의 시간을 스스로 납득하고 견디기 위한 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엄마 없는 시간을 버티는 게 버거웠던 나는 대답을 찾아 도망쳤다. 내가 찾아낸 이유는 동생의 남자 친구였다.
엄마는 동생의 남자 친구를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그는 엄마의 성에 차지 않았고 첫인상도 좋지 않았다. 헤어지라는 종용도 있었지만 동생은 그를 놓지 못했다. 엄마는 병의 재발 이후 동생에게 서운함을 대놓고 드러내기도 했다. 본인이 이렇게 아픈데도 그와 헤어지지 못한다며 동생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들을 일부러 고르고 골라 쏟아내기도 했다.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걸 모두가 느낄 때쯤 엄마는 그를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를 인정할 수 없고 동생을 이해할 수 없어졌다. 동생 남자 친구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다면 엄마가 우리 곁에 조금은 더 오래 함께 했을 수도 있다는 못된 가정을 한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동생이 남자 친구와 하는 모든 행동들이 고깝다. 그가 뭐라고 엄마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 그를 잡고 있던 동생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좁아진 내 마음이 부끄러워 스스로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엄마의 투병 기간 동안 우리 가족 모두는 숨구멍이 필요했고 동생에겐 그가 유일한 휴식처였다. 만약 동생이 엄마 때문에 그에게 등을 지고 돌아섰다면 동생은 그 시절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부모라는 자격으로 자식의 삶을 마음대로 재단할 수는 없기에 헤어짐을 강요하는 건 엄청난 폭력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욱이 미움이 가득 담긴 지금의 내 마음을 나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
이유가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날이 오면 엄마가 그랬듯 나도 동생의 남자 친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는데 엄마의 무덤에는 내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이유가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