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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청객 Mar 20. 2022

14. 노를 젓다가

5주년 기념일에, 우리는 헤어졌다.


어릴 땐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어른들의 말이 싫었다. 사랑 하나면 충분한 것이 아니냐고 낭만적인 생각을 했다. 5년간 만난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위해주었기에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속단했다.


하지만 서로 의지하고 아껴주는 마음이면 충분하다는 명제가 연애에는 성립해도 결혼에는 성립할 수 없다는 걸 아프게 깨달아갔다.


그는 코로나 이후 하던 사업이 매우 어려워졌다. 매일이 고비였고 나아질 기미는 없이 나빠지기만 했다. 자존심 때문에 그가 나에게 자세한 상황을 공유해주지는 않았지만 그의 경제적 상황이 크게 흔들린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결혼이 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 화근이 되었다. 그는 당장 하루하루가 버거운데 미래를 담보해야 하는 결혼에 대한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몇 년 후면 괜찮아질 것이니 기다려달라는 말조차 선뜻 꺼내지 못했다. 그 말이 족쇄가 되어 나를 무작정 붙잡아두고 나의 시간을 갉아먹기만 할까 봐 무서워했다.


그래도 결혼을 하고 싶다는 그 막연한 마음만은 같아서 그는 돈을 벌고, 빚을 갚는 일에 조급증이 나기 시작했다. 잠을 아껴가며 부업을 시작했고 연락은 뜸해졌다. 항상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가볍게 넘기던 그의 장점도 사라져 갔다. 소소한 일상을 나누기보다는 걱정을 나누고 한숨이 오가는 대화가 대부분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그는 일상에 여유가 없어졌다. 여유가 사라지니 사랑은 힘이 없어져갔다.


나는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같이한 시간이 길었기에 쉽게 놓지 못했고 더 많은 시간을 같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전 같으면 충분히 투정 부릴 만한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갔다. 우리의 관계보다도 그의 건강보다도 돈이 먼저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지, 하고 참았다.


그렇게 위태롭게 5주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서로를 위하는 선물을 주고받고 싶었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주면 그에게 행여 부담이 될까 선물은 패스 하자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신에 마음이 담긴 편지 한 통과 꽃 한 송이만 부탁했다.


그런데, 5주년 기념일. 정성스럽게 써온 내 편지와 며칠을 고민하며 고른 식당과 한껏 꾸민 내가 민망하게, 남자 친구는 편지도 꽃도 없었다. 심지어 약속 시간에도 늦었다. 그에게는 우리가 함께 할 미래를 위해 빨리 돈을 벌고 빚을 갚는 것이 더 중요했고 오늘의 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더 먼 미래의 우리를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지금의 우리를 위해 작은 여유와 마음도 내어놓지 못한 그의 모습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언젠가 더 넓은 마음으로 그를 품어주지 못한 내 스스로가 후회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가난이 사랑을 결국 삼켜버린 이 상황에서 그에게 저주의 주문처럼 꼭 들려주고픈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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