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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Sep 01. 2023

프롤로그. 모든 걸 쏟아내면 무엇이 남을까

우리에겐 몰입의 순간이 필요하다

 남김없이 나를 쏟아내며 일했던 때를 돌아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서글픈 마음이 든다.


 "괜찮아, 그래도 잘 살아왔잖아"라고 나를 위로하고 싶어 다른 기억을 떠올려본다. 아이처럼 순수히 즐겁게 놀던 순간. 간절히 원하는 걸 얻어 낸 순간. 졸업, 취직, 결혼, 출산 같은 인생의 변곡점. 기쁨, 감사함, 보람처럼 투명한 감정으로만 남은 순간들.


밝은 빛깔의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도,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서글픈 마음은 지워지지 않는다.




서글픈 감정으로 남은 순간들은 비슷하다. 맡은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몰입했고 끝내 이뤄냈던 순간들이다. 그때의 감정은 모호하고 복잡하다. 스스로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도 마음은 답을 주지 않고, 대체 어떤 느낌이었는지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계속 곱씹어 보게 된다.


 간절히 원하던 바를 이루고 나면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그 여운이 오래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해냈다는 만족감, 성취감은 강렬했지만 짧았고, 우울함과 허무함은 날이 갈수록 자라나서 서글픈 마음으로 자리 잡았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모든 동물은 성교(결합) 후에 우울하다

 책 《라틴어 수업》에서 접한 명문이다. 저자 한동일이 로마 유학 시절 법의학 수업 시간에 배웠다고 한다. 이 문장의 뜻은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이다.


 이 문장을 떠올리며 그 순간들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그때 나는 무엇을 놓쳤다고 생각하기에 그토록 허무했던 걸까.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다


 대학 졸업 후 스포츠 관련 공공기관에 취직하였다. 대학시절 진로에 대해 많이 고민하였지만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했고, 스포츠 관련 다양한 일을 꿈꿨지만 세계를 누비며 국가를 대표하는 일을 가장 하고 싶었다.


 1200대 1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였고, 입사 후 희망하였던 국제 스포츠 관련 부서에 발령받았다. 그리고, 입사 1년이 다 되어가던 시기에 올림픽 실무 담당자가 되었다. 만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어릴 적 꿈을 이루게 되었다.


 선발대로 파견을 떠나 선수단 해산일까지 33일 간 현장에서 고군분투하였다. 선수단을 큰 문제없이 운영하고 대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꿈을 이루었다는 기쁨과 무사히 대회를 치렀다는 성취감도 컸다. 대회 개막식에 입장할 때, 첫 메달이 나올 때처럼 감동적인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대회에 다녀온 후 몇 달 동안 나는 허무함을 이기지 못했다.


 "이 일을 내가 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이뤄야 할 다음 일은 무엇일까?", "이번 경험보다 더 설레는 일이 있을까?", "다음에도 또 이렇게 일할 수 있을까?" 등 다양한 생각으로 괴로웠다.


회사에서도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연달아 생기며, 불타오르던 꿈은 아무 불씨도 남지 않게 되었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이 명문을 종교학적으로 해석하면 "윤리적 인간이 비윤리적 사회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영적인 동물로서 이성적 인간이자 종교적 인간을 지향하게 된다"는 뜻이다.


 조금은 알겠다. 그때 나는 나에게 맞지 않는 사회에서 고통 받았던 것이고, 이성적 인간에 조금도 다다르지 못하고 퇴사라는 회피책을 택했던 것이다.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몇 년이 지나서야 나에게 남아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 몰입의 순간 내가 놓친 것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였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할 만큼 최선을 다했고, 다른 어떤 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그 일에 몰입했다. 그러나 치열하게 살아내던 매 순간마다 나는 흔들렸고 깎여 나갔다.


 몇 년 동안이나 그 순간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조금씩 나를 둘러싸고 있던 타자의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은 직장인의 일로서 나에게 맞지 않았다. 당시에는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진짜 내 모습은 아니었다.


 수년이 흐른 후에야 불현듯 찾아왔던 그때의 서글픔을 겨우 받아들였다. 그 복잡하고 모호한 감정은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저 받아 들여야 할 뿐.


더 깊어지고 넓어진 나를 발견하였다. 그제야 조금은 나다운 삶을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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