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화요일 아침. 제주도 가서 일해야지, 하는 옆동네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요일 오전 제주행 일박이일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가방에 거대하고 무거운 노트북을 넣고 들어 보니 내다버리고 싶었지만 충전기라도 빼고 가니까 조금은 가볍겠지 싶었다. 왼쪽에 c타입 포트가 있으니까 핸드폰 충전기로 당연히 충전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안일한 착각에서 비롯된 행동이 일으킬 파장의 크기는 짐작조차 못했다.
비행기가 뜨기 전 작업할 파일을 보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핸드폰으로는 열리지 않아서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짐을 놓고 노트북을 갖고 나와 근처 카페에 갔다. 파일을 확인하고 영상을 보며 pd님과 통화하다 보니 85%가 되어 있었다. pd님은, 오늘 중으로 주면 좋긴 한데... 내일까지 될까요? 했다. 내일까진 가능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 노트북에 충전기를 꽂았다. 충전이 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핸드폰에 꽂았다. 잘 됐다. 아?... 망했다. 전력을 많이 쓰는 내 노트북은 충전기를 꽂지 않고서 작업하다가는 한 시간이면 방전될 게 뻔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파바박 떠오르는 여러 가지 선택지를 순서대로 나열했다. 당연히 비행기 티켓을 바꾸는 건 맨 나중이었다. 우선 충전기를 사야겠다 싶어 제주시에 있는 삼성 디지털 프라자를 갔다. 직원에게 모델명을 말하자, 이 노트북은 고전력을 필요로 하는 노트북이라 충전기를 안 팔 뿐더러 배송하면 이틀이 걸리고 가격은 10만 원이 넘으며 직원들 중에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다음 안은 노트북을 대여였다. 서울에는 차고 넘치는 게 노트북 대여 업체였지만 제주도는 그렇지 않았다. 여행객들에게 카메라, 캠핑용품, 노트북 등을 대여해주는 업체가 유일했다. 다음날 오전으로 예약했다. RAM이 4GB이었지만(문서용에 적합한 사양) 일단 작업을 할 수 있기만 하면 됐다. 저녁 먹을 때 빼고는 핸드폰으로 검색하고 전화하고 예약하고 고민하느라 하루를 보냈다.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대여 장소는 공항 근처였다. 다행히 숙소가 제주시내여서 그리 멀지 않았다. 예약한 시간보다 빨리 도착해서 노트북(이하 그램)을 찾고, 호텔로 돌아와 내 노트북을 같이 들고 근처 스타벅스로 갔다. 솔직히 아, 제주도까지 왔는데 그래도 다른 카페 갈까? 했지만 작업 시간이 촉박해진 이상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와이파이 잘 터지고 오래 있어도 무리가 없는 곳에 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도 안일했다. 저런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니. 어쨌든 호텔 근처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 제주도니까 제주 녹차 치즈 베이글과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램을 열었다. 내 노트북에 비하면 태블릿이나 패드 수준의 크기와 무게였다. 그 작고 귀여운 그램에 에펙을 설치했다. 이제 작업할 수 있겠다, 라는 약간의 안도감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영상을 올리자마자 그램이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재생조차 안 됐다. 껐다, 켰다, 설정도 바꾸길 여러 번... 그램이 저절로 종료되기까지 했다. 에펙을 받아들이기엔 그램이 너무 작고 귀여웠다. 친구가 자기는 처음 배울 때 그램으로 했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예전에 학원 다닐 때 그램으로 C4D (3d 프로그램)을 돌렸다. 그냥 그램 뽑기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다음 안은 피시방이었다. 오전 아홉 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전날, 대여와 피시방을 거의 동일선상에 두고 고민했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피시방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조금씩 밀고 들어와 대여를 택했다. 지금에서는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택도 나름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였다. 아무튼, 짐을 스벅에 전부 내버려두고 근처 피시방을 돌아다녔다. 일단 에펙이 설치되고 영상이 돌아가는 걸 확인해야 했다. 이것마저 안 되면 진짜 집에 가야 했다. 일단 pd님에게는 노트북이 고장 났다며 시간을 벌었다. 지도에 표시돼 있는 피시방 두 개는 영업을 하지 않았고, 세 번째 피시방인 레드 PC존에 도착해서 40분을 결제했다. 에펙을 설치하고 영상을 올리자 원활히 돌아갔다.
진짜 작업이 되겠다 싶어 그대로 두고 스타벅스로 돌아와 옷, 가방, 노트북 두 개를 챙겨서 피시방으로 갔다. 도착해서 잠시 사용했던 내 자리로 갔더니 컴퓨터가 종료돼 있었다. 짐 가지러 간 사이 알바생이 내가 쓰던 컴퓨터를 종료했다. 물론 말하지 않고 나간 내 불찰이지만 시간이 30분이 남았고 외장하드도 꽂고 나갔다. 피시방 특성상 종료하면 포맷되기 때문에 에펙을 다시 설치해야 했다. 침착하자, 싶었다. 알바생이 미안해하며 다시 40분으로 넣어줬다. 약간 격앙된 말투로 컴퓨터 종료하신 거냐고 물어본 게 미안해졌다.
이젠 진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네 시간을 결제했다. 오전 열 시쯤이었다. 오후 두 시 안에는 끝내는 게 목표였다. 작고 귀여웠던 그램 모니터를 보다가 옆으로 넓고 시원한 모니터를 보고, 무지갯빛이 찬란한 기계식 키보드로 작업을 하니까 편하긴 했다. 다만 거긴 제주도였다. 살면서 피시방에 두 시간 이상 있어본 적이 없고, 성인이 돼서는 프린트하러 갈 때 빼고는 간 적도 없는 피시방에 오전부터 앉아있었다. 그렇지만 난 근무자기 때문에 일을 해야 했다. 집에 안 간 게 어디냐 싶어 최대한 빠르게 작업을 마쳤다. 오후 세 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제주도 오기 전날, 제주시내에 있는 music bar를 여섯시에 예약했다. 예약금을 걸어놓는 곳이고 당일에는 취소할 수 없었다. 거기만이라도 시간 맞춰 가는 걸 목표로 삼았다. 작업은 다 했으니 이젠 보내기만 하면 됐다. 저 난리통 안에서 작업을 다 해낸 게 어디인가. 검수를 위해 렌더(영상으로 출력)를 걸었다. 렌더가 안 됐다. 그럼 작업한 것도 의미가 없었다. 렌더를 하러 집을 갈 수는 없었다. 갈 거면 오전 여섯 시에 당장 갔어야 했다. 어떡해야 할까, 하다가 작업 파일을 외장하드에 그대로 옮겼다. 노트북에서 렌더만 하면 됐다. 피시방 데스크탑 앞에 내 노트북을 열고 동시에 뭔가를 하는 일은 정말 어지간해서 벌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배터리는 40% 정도가 남아 있었다. 밝기를 최대한 낮추고 렌더를 시작했다. 다행히 잘 됐다. 고철 덩어리가 될 뻔한 노트북이 제값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다른 채널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수현씨, 우리 저번에 작업했던 ○○○ 있나요?라고. 노트북을 찾아보니 작업 본이 있었다. 다행히 시간만 바꾸면 되는 거라 30%가 남은 노트북을 붙들고 그 선배 꺼를 먼저 수정해서 보냈다. 그다음 원래 하던 작업의 마스터 파일을 pd님에게 보냈다. 당연히 수정이 있을 거라 잠자코 기다렸다. 렌더 할 배터리를 남기기 위해 노트북을 종료하고 잠재워두었다. 잠시 뒤에 pd님에게 수정 사항이 왔다. 다행히 몇 개 없어서 피시방 데스크탑으로 작업하고, 외장하드에 옮긴 뒤 내 노트북에서 렌더 해서 전송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pd님은 수고하셨다고 답했다. 드디어 이 긴 여정의 끝이 보였다.
정신이 돌아오자 문득 제주도에서의 하루를 이렇게 날리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날린 게 아니라 사력을 다한 것이지만) 스벅에서 작업하며 현무암 러스크나 주상절리 파이 같은 걸 먹었다면 덜 아쉬웠을까 싶기도 했다. 중간에 한번 더 결제한 시간은 두 시간이 남아있었다. 켜놓은 채로 나가서 잊고 있던 밥을 먹기로 했다. 수고했어요, 고생했어요, 라는 대화를 나누고도 갑자기 '죄송한데 이것 좀 수정 부탁드릴게요ㅠㅠ' 하는 연락을 받는 게 내 일이니까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내 컴퓨터를 종료했던 오전 남자 알바생이 퇴근하고, 오후에 온 여자 알바생에게 내가 쓰던 컴퓨터는 종료하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네시가 다 돼서 피시방을 나왔다. 여섯 시간 만이었다. 출소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일 부탁이 또 오기 시작했다. '수현 씨ㅠㅠ 저희 예고 급히 만들어주셔야 돼요' '수현씨 미안한데 편성이 바뀌었어요ㅠ 예고랑 ID 새로 해야 할 것 같아요' 하... 명절 전에도 이렇게는 안 바쁘다. 탄수화물이 들어가니까 머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건지, 선배들에게 잘 얘기해서 당장은 하지 않을 정도로 대화를 마무리를 했다. 그때 전날 산모기에 물린 발목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접질린 것처럼 부어있었다. 모기도 오늘 내게 일어난 일을 암시했던 것 같다.
이제 하루 더 있을까 말까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내내 나의 대환장 파티를 랜선으로 함께해준 친구에게 말하자 나라면 하루 더 있어.라는 답이 왔다. 그램, 피시방, 택시, 비행기 취소 수수료 등 예상치 못한 지출이 마구 생겼지만 일단 표를 취소했다. 그램은 다음날 오전 아홉 시까지 반납이었으나 지금 갖다 주지 않으면 또 아침 댓바람부터 공항을 가야 했다. 당장 가는 게 맞았다. 인테리어는 예뻤지만 맛은 그저 그랬던 관덕정 분식에서 식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향했다. 가면서 금요일 집으로 오는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했다. 전원만 껐다켰다를 반복한 그램을 반납하고 피시방에 돌아가서 꽂아뒀던 외장하드를 뽑은 뒤 14분이 남은 컴퓨터를 종료하고 나왔다.
그리고는 예약해둔 bar로 향했다. 시내로 돌아오자 거의 여섯 시가 다 되었다. 드디어 온전히 내 시간이었다. 탑동의 골목에 있어서 상호가 탑동골목이었던 bar에 들어섰다. 피시방과 비슷한 조도의 공간이었지만 천국과 지옥의 차이였다. 글렌피딕 하이볼을 주문하고 리클라이너에 몸을 맡겼다. 아무도 대화하지 않는 곳에서 단 여섯 명만이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이 대환장의 여정은 탑동골목에서 말도 안 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설계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건 해몽이 중요한 법이다. 어쨌든 일은 해냈고, 잘 끝났고, 제주도의 bar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니 그걸로 된 것이었다. 이 긴긴 이야기의 결론은. 탑동골목에 간 사람 중 어쩌면 내가 제일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음날도 환장의 파티를 벌였지만 그건 쓰지 않겠다. 전날보단 소박했다. 소환장이었다. 그렇지만 다음 날 역시 레드 PC존을 갔고, 함덕 해수욕장에 가서도 장동민이 운영하는 크라우드 피시방을 갔다는 건 적어놓겠다.(먼저 갔던 함덕의 온에어 pc방은 USB를 꽂을 수 없는 곳이었는데, 그곳의 친절한 알바생이 지도에 안 나오는 크라우드 피시방을 알려줬다. 구세주였다) 어찌 됐건 이번 제주도 대환장행은 여러 가지로 잊지 못하게 됐다. 그 어느 때보다 시내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생전 처음 피시방에서 두 시간을 넘게 있어봤는데
그게 제주도였고,
바다보다는 시내의 공사장을 많이 봤고,
가장 많이 마주친 건 SPAO와 스타벅스 칠성점 건물이었고,이 험난한 여정 끝에 마시는술 한 잔이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한 여름 날씨에 노트북 두 개를 들고 제주 시내를 누볐던 몸뚱이를 눕히고 나니 드디어 모든 게마무리된 것 같았다. 충전기의 부재가 쏟아 올린 여정은 험난했지만, 2021년 가을에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