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종호 교수의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
지난 연말과 마찬가지로 이번 연말에도 나종호 교수님 책 이야기를 하게 됐다. 바쁘신 와중에도(본업 외에도 sns, 인터뷰, 방송 등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모양)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이라는 책을 한 권 또 내셨다. 좋은 책이라 굳이 추천이 필요 없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이 책이 내게 와닿았는지 글을 남겨 본다. (이하 존칭 생략)
저자는 지난 도서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은 정신 장애에 대한 편견을 줄이는 데 일조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면, 이번에는 위로가 되는 책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개인에게 미치는 사회문화적, 구조적 요인의 영향이 축소, 은폐되고 개인에게 생존의 많은 짐이 지워지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서, 그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거시적 환경 요인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몇 안 되는 정신과 의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개인을 둘러싼 구조적 요인이 크게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 개인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위로를 전할 수 있을지 고심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두 번째 책을 쓰겠다고 계약하고도 미루다가, 자신의 북토크에 참석했던, 나중에야 알게 된 이태원 참사 생존자이자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의 저자 김초롱 님과의 짧은 대화가 미뤘던 쓰기를 하게 된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Q&A 시간에 김초롱 님은 자살이 왜 나쁘냐는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여러 예를 들며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 축소하고 터부시할 일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 큰 사건이라는 답변을 했다. 그녀는 자살이 사회적 책임이 있는 죽음이라면 주변 누군가가 자살을 생각하게 됐을 때 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조력자가 되어 그 사람의 '사회'가 되어 주겠다며, 다시 앞으로 나아갈 희망이 되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 누군가에게 위안을 건네어 살아갈 힘을 보탤 수 있는 '작은 사회'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던 듯하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 위로를 건네는 데 자신의 '취약성 드러내기' 전략을 사용한다.
저자는 누가 봐도 넘사벽 커리어(서울대 심리학과 졸업-서울대 의전원 졸업-뉴욕에서 수련-예일대 교수)를 쌓아 왔다. 이전 저서나 유퀴즈 등의 매체를 보면 똑똑할 뿐만 아니라 편견 없는 겸손한 자세로 환자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인품마저 훌륭한 사람으로 보인다.
한편, 이렇게 남들 보기에 별다른 곡절 없이 탄탄대로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 아픔과 소외를 겪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들 수 있다. '이런 일로 힘들어해도 될까?',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 것 아닐까?' 하며 이미 수백수천 번 자기 검열과 비판을 해온 사람이라면, 이렇게 '완벽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취약성 드러내기는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아' 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대상관계 이론에서는 분열구조에서 통합구조로의 이행을 성숙이라고 본다. 쉽게 말해서 분열구조란 나와 세상을 '좋다', '나쁘다' 이분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예를 들면, '너무 좋다'와 '너무 나쁘다'를 왔다 갔다 하거나, 나쁜 면을 억압, 부인하거나, 나쁜 면만 부각해서 본다.). 통합구조를 지향한다는 것은 나와 세상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평가절하하지도 않으면서 나와 세상에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음을 두루 품거나 견뎌가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좋은 나와 나쁜 나를 통합할 수 있으려면 누군가로부터 나쁜 나도 괜찮다는 것을 안전하게 수용 받는 경험을 숱하게 해야 한다. 어릴수록 나를 반영해 주고 수용해 주고 공감해 주는 주요한 타자(대상)라는 미시적 '환경'이 중요하다. 물론 성인이라고 해서 이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주요한 타자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사회문화적 요인 모두 통합을 촉진할지 분열을 조장할지에 큰 경향을 미친다. 취약한 모습에 대해 직접 부정적 피드백을 받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 '멘탈이 약한가 봐'하고 비난받는 모습만 봐도 유사한 나의 취약성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이를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나의 부족하고 취약한 모습에 대해 비난받거나 수용 받은 경험이 부족하면 그러한 나의 모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좋은 나'와 '나쁜 나'로 분열(splitting)하여 나쁜 나를 억압하거나 타인의 것인 양 외부로 투사해 버리기 더욱 쉽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이분법적으로만 보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좋음과 나쁨, 내 편과 적으로 나누기도 쉬워진다.
일견 완벽해 보이는 저자는 대학 시절에 임상심리학자가 되기 위해 미국 대학원 준비를 하던 시기 즈음부터 심한 불안 증상을 겪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원 진학 실패한 뒤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이에 더하여 우울감이 수반된 적응 문제를 겪게 됐다. 가족과 여자친구는 큰 힘이 되어 주었지만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나 심리학을 공부하고 정신과 의사를 희망했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대인관계 집단상담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나 상담에 대한 편견에 가로막혀 외부 도움을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의전원 졸업 후 트레드밀에서 고속질주를 계속해야만 하는 듯한 한국 사회에서 벗어나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하며 미국으로 옮겨간다. 소수인종이자 언어적 장벽이 있는 외국인으로서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잘 적응하고 교육분석의 일환으로 (레지던트 중에서 가장 늦게나마) 상담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잘 적응하고 남보기에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었던 큰 힘으로 그는 '운'에 포함될 수 있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강조한다. 그가 잘나고 적응력이 좋아서가 아니라(물론 그런 점도 당연히 있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내리사랑(pay it forward), 한국보다 더 여유로운 근무 환경, 치료와 상담에 대한 더 열린 태도 등 적응을 촉진하고 수용적인 환경 속에서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마이클 펠프스나 드웨인 존슨 같은 강인한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 질환과 우울증에 대해 고백한 것이 큰 용기가 되었다고 한다.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할 것 같고 괜한 소리를 해서 약점 잡힐 것 같은 한국 문화 속에서는 특히나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받은 내리사랑을 다시 pay it forward 하듯, 몸소 용기를 내어 자신의 취약했던 시절과 부족한 모습들을 고백한다.
누군가는 '뭐 이런 일들로 힘들다고 해? 나는 더 힘들었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한', '나만큼 힘들지 않은' 취약성이나 고통이니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저자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의 고통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무엇보다도 '이런 정도의' 고통도 힘들다고 말하는 내 모습을 봤으니 당신의 고통은 더욱더 힘들다고 인정하고 도움을 구해도 괜찮다는 초대로 받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취약성 드러내기는 듣는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감정의 쓰레기통인 양 다 쏟아낸다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상대에게 우리 함께 서로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얘기해도 괜찮다고 초대하는 행동이자, 상대에게서 위로와 공감, 수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행동이기도 하다(보통은 후자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우리는 안전하고 따뜻한 수용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진정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 덧붙이자면, 자신의 취약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타인의 취약성 또한 진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남의 취약성 드러내기는 받아주지만 자기 이야기는 꺼린다면 '남은 나만큼 중요하지 않으니 상관없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여전히 다음과 같이 반론할 수 있다. 적어도 취약성을 '지금은' 드러내도 될 만큼,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뭔가 이룬 게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저자의 취약성 드러내기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저 영웅의 '인간적 결점'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저자 또한 취약성 드러내기를 통해 큰 혜택을 받았다. 특히나 타인의 평가 염려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된 '사회불안(social anxiety)'을 겪었기에 더 그러할 것 같다.
저자의 내심에는 누구나 그렇듯, '드러나는 자기'가 어느 정도 좋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전 책에도 그런 바람에 부합하게 어느 정도 정제된 내용을 기술하였을 것이고, 방송에서도 그런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너무 심하게 자신이 미화되었다고 생각하며(방송에서 특히 더 이상회 된 모습으로 편집됐다고 여김) 자신이 '지각하는 자기'는 물론 '보여주고 싶은 자기'와 '드러난 자기' 간의 큰 괴리에서 불편감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도 위대해 보이는 사람이 쓴 책을 보고 동기부여됐던 경험이 있었듯, 따뜻하고 정의로운 의사로 비치는 자신에게서 영감과 동기를 얻은 어린 친구들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완벽하기만 한 사람은 없으며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 자신이 단지 내리사랑할 수 있을 만큼 이룬 게 많고 용기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좋다는 것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화된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사람 앞에서 침묵한다면 기만적이어서 불편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습에 부합하도록 자기를 끊임없이 검열하고 부족하고 못나 보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수고스럽고 긴장감과 불안감을 가중시킬 것이다.
취약성 드러내기는 타자를 위해 손을 내미는 행동이면서 동시에 온전하게 자신을 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위하는 일과 나를 위하는 일은 이렇듯 연결되어 있다. (이에 대해 결국 모든 사람은 이기적 동기에 의해 추동된다는 식으로 타자를 위하는 것은 절대 없다고 흑백논리적으로 접근하지 않기 바란다.)
그는 정신건강의 위해서 중요하게 처방하는 것은 '운동'과 '사회적 연결'이라고 말한다. (운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미 좋은 책도 많이 있고 혹은 저자가 다른 지면을 빌어 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앞서서도 그는 구조적 요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자살을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고 거시적 환경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언급하며 변화를 촉구하는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리나라 사람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지만 동질적 문화라 더 세밀한 종류의 비교가 이루어지며 완벽을 요구하는 사회 이미지로 기술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좀 더 덧붙이자면,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개인에게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 환경보다는 개인 '의지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강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에 기여한 한국 특수적 상황으로 한국이 고도의 압축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점을 꼽고 싶다. 성장이 쉽게 가시화되는 환경에서 주변의 성취를 실제로 자주 목도했을 것이며 그에 따라 '하면 된다'는 마음이 강해졌을 것이다. 환경 탓을 하는 것은 핑계로 여겨졌을 것이고 스스로도 이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녀 세대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보았을 때 지난 수십 년 만에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은 '원자화된, 소비하는 개인'이 되었다(이 부분은 최근에 나온 <정신병을 팝니다> 참고하면 좋다. 추후에 기회가 되면 관련해서 글을 쓰려고 한다.) 이러한 중첩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한국인들에게 특히나 구조적 문제는 비가시화되고 개인의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뼛속까지 관계적, 사회적 존재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해를 명시적이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표현하고 그걸 실천하는 사람이다. 추측건대,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다문화 배경의 사람들을 정신과 의사로서 만났던 것뿐만 아니라 공중보건을 연구하기도 하고 본인의 이주 경험에서 환경의 영향력을 체감하면서 나와 미시적 환경 너머의 더 큰 구조를 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OECD 자살률이 1위였던 것은 아니며 IMF 이후가 변곡점이었다고 한다. 이는 곧 사회경제적 요인이라는 구조가 얼마나 개인의 고통에 영향을 미치는지 반증해 주는 정보이다. 개인 수준의 인스턴트한 약물 처방만이 답은 아니며, 개인 차원에서 사회적 연결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을 더더욱 확충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들은 환경의 영향을 말로는 중요하다고 하지만 진료실 밖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개인의 미시적 환경인 가족과 대인관계 정도만 살핀다. 이전에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의 유사한 자서전적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거시적 환경 요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가족사나 개인 건강 등과 관련된 꽤 큰 시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마저도 자신의 회복력이나 긍정적 사고방식을 돋보이는 양념처럼 기술되어 있었다.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에 대해 심리학적 언어로 재포장했을 뿐 환경적 요인보다는 개인의 힘을 알게 모르게 강조하는 뉘앙스가 강해, 큰 시련을 극복하고 성취를 이룬 사람들 특유의 '개천에서 난 용' 자서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쉬움과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도 상담자로서, 결국 상황이 바뀌기보다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거시적인 상황이 바뀌지 않아 나도 바뀔 수 없다는 태도는 무력감만을 가중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주야장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진공 속에 있거나 단지 미시적 환경에만 영향을 받는 존재가 아닌데 어쩐지 너무 중요한 이야기를 배제해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특히나 자신의 탓만을 하는 개인에게 사회적 구조에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하고(이에 작게나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크고 작은 계획을 함께 세울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고), 더 나아가 사회를 이루는 책임 있는 개인이자 정신건강 종사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사회적 연결과 안전망을 촉진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나종호 교수는 좋은 롤모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