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같은 소리 계속 할거면, 앞으로 내한테 연락하지마라.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던 유일한 남사친 K로부터 들은 마지막 말이다.
K와 나는 남매같은 친구사이였다. 그가 군대에 있을 때는 내 생애 가장 암울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때 우리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생의 밑바닥 시기를 함께 보냈던 터였는지 우리의 우정은 조금 남 달랐다. 그는 내게 여사친이라해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남자의 세상에 대해 들려주었고, 나는 그런 K에게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찌질한 이야기를 서스름 없이 할 수 있었다. 벌써 그 일이 있은지 6년이나 흘렀다. K와의 마지막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내게 해준 말이 잊을 만하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연애를 할 때마다 상대에게 내 마음을 다 의지하고 싶었다. 그저 사랑받고싶고, 인정받고싶고, 관심받고 싶었다. 나는 누군가를 쉽게 좋아했고 금새 그와 그려나갈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어쩐지 상대는 내가 솔직할 수록, 가까이 다가갈 수록 나와 더 멀어져갔다.
K는 연애 고수였다. 엄청난 미남은 아니었지만 키가 크고 보조개가 매력적인, 매년 장학금을 받을만큼 성적이 좋았고 이력서를 넣는 곳마다 모두 합격할 만큼 매력있는 남자였다. 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든지 사귀었고, 지루해질 때쯤이면 쿨하게 다른 여자를 만나던 연애 고수. 그런 그였기에 나는 K에게 내 연애사를 구구절절 이야기하며 조언을 구하곤 했다.
한번은 내가 물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기대게 되더라. 나도 니처럼 좀 초연해지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안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냐"
나는 늘 궁금했다. 비슷한 유년시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사람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기대고 싶어했고, 그는 항상 초연해 보였으니까.
"내가 왜 니처럼 감정에 안 휘둘릴 수 있는지 아나? (손바닥을 폈다가 오므린다.) 손에 물을 계속 담고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노? 주먹을 꽉 쥐면 안되겠제. 연애도 그런거다. 손을 꽉 쥐면 물이 새어나가는 것처럼 손에 힘을 풀고 여유를 줘야지."
유일한 남사친과 절교했던 그 날. 우리는 줄곧 자주 앉아 이야기하던 중학교 벤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K는 내게 단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나쁜 남자이긴 했지만, 나의 구구절절한 연애상담을 묵묵히 들어주던 친구였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아픈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병신같은 소리 계속 할거면, 앞으로 내한테 연락하지마라."
한번도 내게 화를 낸 적 없던 그였기에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때 니가 뭔데 그런 소릴 하냐며 화를 냈고, 그렇게 십여년의 우정이 어이없게 끝나버렸다.
그는 오랜 기간동안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보며, 내가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걸 지켜봐왔다. 아마 나를 아끼는 마음에 그랬었을테다. 더이상 상처 받지 않길 바라니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분노하기 바빴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혼자인게 싫었고 외로웠다. 그렇게 누가봐도 끝이 보이는 연애를 끝냈고, 몇몇의 사건을 겪었다.
"연애도 그런거다. 손을 꽉 쥐면 물이 새어나가는 것처럼
연애 할 때도 물이 담길 수 있게 여유를 줘야지."
나는 어이없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야, 말이 쉽지. 그걸 어떻게 하는데?"
그는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이 보고 싶고 기대고 싶을수록
나한테 집중하려고 노력하거든.
그래야 집착하지 않고 오래 갈 수 있으니까.
내는 뭐 그게 항상 쉬운 줄 아냐..?
30대를 앞두고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작은 성취들을 이뤄나가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생애 처음으로 근육 운동을 해보고, 영어공부를 했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더 좋은 내가 되고 싶어서,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온 힘을 다해 나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마다 그의 말을 떠올렸다. "집착하는 마음이 들 수록 너 자신에게 집중해라."
나는 현재,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주는 남편과 살고 있다.
늘 같은 옷을 입고 부시시한 모습으로 마중을 나갈 때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부비는, 입술을 막고 찡그리는 모습 마저 사랑스러워하는 사람. 남편과 연애를 할 때는 사실 결혼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이끌리는대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과 있으면 기분이 좋았고 편안했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가장 나다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롯이 내게 집중하며 작은 성취들을 계속 이루어나갔다.
나는 지금도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집착하고 싶을 때면 K의 말을 떠올린다. 그에게서 나왔던 여유로움은 움켜쥐려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하는 것에서 비롯 되었다. 나는 이 교훈을 연애 뿐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던지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첫째,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수록 의도적으로 멈춘다.
나는 무엇이든 잘하고 싶은, 완벽하게 하려는 강박이 있는 편이다. 무언가 내게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을 해야할 때면 더욱 불안정하고 초조함을 느낀다는 것을 잘 아니까.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이 불안할 수록 방향을 놓치지 쉬우니까,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니까.
특히 글을 쓸 땐 더 그렇다. 떠오른 영감이 사라질까봐, 지금은 기억해도 나중에 기억하지 못할까봐. 당장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초조함도 종종 느낀다. 그럴 때면 바로 옷을 갈아 입고 찬 바람을 쐬로 밖으로 나간다. 걸으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휴대폰에 갈겨 버린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여유롭게 물 한잔 마시고 옷을 갈아 입고 명상을 한다.
"내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된다. 전문가처럼 지식을 뽐낼 필요 없다. 나의 철학과 경험이 담긴 글을 쓰면 그걸로 충분하다. 너의 경험이 반드시 도움이 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정리하고 글을 써내려가다보면 의도하지 않았던 여러가지 글감 리스트가 주루룩 이어진다.
둘째,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참는게 오히려 나를 나답지 않게 한다는 걸 알았다. 내 마음을 너무 솔직하게 표현해서 상대방이 떠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다움에 대해 고찰하면서, 그와 다르게 나는 내면에 떠오르는 영감, 감정을 무엇이든 표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너무 순진하게 좋은거 다 표현하는거 아니냐고, 상처받는다고 걱정스레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가장 나답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 나를 만만하게 보면 어떡하지? 그런 마음이 들면 벌써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행동을 보이며 억지로 상대방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가면을 써야 하는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나의 방식이 모두에게 다 맞을 순 없다. 하지만 상대방의 방식도 내게 썩 맞는게 아니라면 굳이 서로 맞춰야할 필요는 없다. 서로가 가장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어야 관계는 오래 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이라 여길수록 사람은 더욱 애를 쓰게 된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집착하게 되고, 다른 기회를 보지 못한다. "집착하는 마음이 들 수록 너 자신에게 집중해라." 나는 이것이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고 하지 말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가장 자연스럽고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그렇게 되면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