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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Aug 22. 2023

예기치 않은 난관과 변하지 않은 희망

자립작가 지망생입니다 #2

하루에도 몇 번씩 공무원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게 해 달라며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더니 진짜 사직서를 내고 사무실을 뛰쳐나오는 날이 찾아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시간만은 넘쳐나서 좋아하는 일을 원 없이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새벽에 일어나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고 일러스트학원에서 종일 그림을 그렸다. 중간중간 글을 썼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집에 돌아와서는 영어공부에, 자기 전에는 스트레칭에 얼굴 마사지까지 하고 일기를 썼다. 고양이들과도 충분히 놀아줬다. 더 이상 무엇도 바라는 바 없는 흡족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믿음이 현실이 됐다는 기쁨을 덮고 잠들었다. 직장인으로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던 체력과 인내심이 살아있었고 대출을 정리하고 남은 퇴직금의 일부가 통장에 남아있었고 나도 가족도 고양이들도 모두 건강해 걱정할 일이 따로 없던 시기. 게다가 이제 하루 24시간이 전부 내 것이라니. 노력하지 않아도 의욕이 넘치고 기분 좋았던 마법 같던 날들. 하지만 완벽했던 시간은 일 년으로 끝나버렸고 그 뒤에는 나란 인간의 기본값을 확인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 나는 부지런한 인간이었다. 체력이 심하게 떨어져 앓아눕거나 번아웃이 와서 사무실만 간신히 왔다 갔다 하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배우고 그리고 읽고 썼다. 사무실이 바빠 정시퇴근은 꿈도 꾸지 못할 때라도 새벽, 한밤을 가리지 않고 어떡해서든 펜을 들었다. 주말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창작과 관련된 수업을 듣느라 온전히 쉬어본 적이 별로 없다.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언제나 눈이 벌갰고 잠을 줄여가며 몸을 움직였다. 그렇기에 퇴직 후 일 년이라는 마법이 끝나고 천성이 부지런해서 끊임없이 불을 지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당황스러웠다. 직장인이라는 한계가 오히려 나를 절절하게 피어오르게 했던 것이었다.





직장은 오랫동안 확고한 삶의 최우선순위였다. 출근은 인류의 존망이 걸린 미션완수같이 절대적이었다. 그만두고 싶다며 영혼은 흐느끼면서도 육체는 쉴 새 없이 업무를 수행했고 퇴근 후에는 온종일 흐느꼈던 시간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전투적으로 좋아하는 일에 매달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낭비하고 싶어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좋아하는 일이 고된 일과를 보낸 후 자기 전 30분이라든가 월화수목금요일 내내 손꼽아 기다린 후 힘들게 맞이한 주말이 아니라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 되는 순간 간절함이 사라지고 나의 기본값이 드러났다. 오래전, 아무런 의무와 책임이 없는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나는 무엇을 했던가? 방학이면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AFKN을 틀어놓고 영어가 저절로 느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소파에 누워 시간을 죽였던 날들. 하고 싶었지만 아침에는 저녁으로, 저녁에는 내일로 미루고 미루다 영영 하지 못한 일들의 목록. 가슴이 철렁했다. 외적 강제가 없는 나는 그냥 게으르고 무른 인간이었다. 그걸 이제야 떠올리면 어떡해.


직장이라는 강력한 규제이자 동력이 사라지고 실체가 드러난 게으른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모든 일이 핑계가 된다. 최근 작업재개를 선언하고 주 5일 근무를 철저히 지키려는 중인데도 얼마 전에도 목금토일을 연속으로 쉬어버렸다. 목요일은 태풍이 온다길래 태풍의 눈이 언제 내가 사는 지역을 지나갈까 실시간으로 태풍의 이동경로를 살피며 쉬었고, 금요일은 아침에 수영을 했더니 왠지 몸살이 올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 쉬었다. 태풍은 점차 작아져 약한 비만 뿌리고 지나갔고 기다리던 몸살은 오지 않았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주말이니 당연히 쉬었다. 핑곗거리라도 있으면 양반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오래오래 쉬기도 한다. 그러다 한 계절이 훌쩍 지나갈 뻔한 적도 있다.





어렵게 얻은 새출발의 기회를 헛되이 날려먹지 않으려면 직장인이었을 때보다 더 강력한 동기부여와 자기 규율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과의 약속이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부여받은 마감이 없는 날에는 온갖 핑계를 대며 하루를 공치는 날이 많다. 직장인이었을 때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사직서를 내지 못하고 영원히 지금 있는 곳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힘들게 고민한 끝에 직장을 그만두고도 5년이나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두렵다. 시간만 흘려보내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까 봐, 경력도 돈도 없이 나이만 먹을까 봐.


뒤늦게 알아차린 천성과 또 다른 두려움 사이에서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 쓰고 싶고 그리고 싶다는 열망. 동기를 잃고 나태한 날을 보내느라 여러 번 그 뜨거운 마음에 응답하지 못했음에도 고맙게도 변함없이 그대로인 나의 유일한 희망. 그 덕분에 이대로라면 자립작가가 아니라 허송세월의 달인이 되지 않을까 식은땀이 날 때에도 땅을 치며 후회하는 대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내 선택이 옳음을 확인한다. 믿을 수 없이 게으른 자신의 모습을 마주해도 실망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본값이 뭐가 중요하랴. 매번 자립작가 지망생의 일상에 맞는 새로운 값을 입력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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