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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주영 Oct 04. 2020

복수극이라고 쓰고 히어로물이라고 읽는다

안토니오 캠포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202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복수’에는 인간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무언가가 있다. 복수를 둘러싼 수많은 서사가 존재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부조리한 것, 부당한 것을 똑같이 갚아줌으로써 ‘바로 잡는다.’ 행위 그 자체만 보면 극도로 잔인한 사건도, 그 행위의 이유가 정당하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용인하며 때때로 이렇게 평한다. ‘당해도 쌌네.’


안토니오 캠포스(Antonio Campos) 감독의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The Devil All the Time)>에서 어빈(톰 홀랜드)의 총알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서도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있다. ‘죽어도 싼 놈들이었어.’ 혹은, 어빈의 아버지 윌러드(빌 스카르스고르드)의 말을 인용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나쁜 개새끼들이 많아.’ 영화 속에서 그 ‘개새끼들’이 죽을 때, 우리는 일종의 안정감과 영화적 쾌락을 느낀다. 


러닝 타임 초반 삼 분의 일 동안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일견 종교에 대한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1960년대 미국 촌 동네. 결코 풍족하지 않으며 거칠거칠한 삶의 결을 그대로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종교에서 질서를 찾고자 한다. 그들에게 교회의 목사는 메시아적 존재이며, ‘진심’과 그 진심을 담은 ‘기도’로 구원받지 못할 일은 없다. 그러나 영화는 차례차례 그 기도가 배반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그 맹목적이고도 절박한 믿음은 차라리 상황을 악화시키는 듯 보인다. 윌러드가 신에게 제물로 바친 개의 시신은 아내의 회복 대신 아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져왔으며, 두려움을 극복하는 치료책으로 아내를 죽이고 부활시키라는 신의 ‘계시’를 받은 로이(해리 멜링)가 맞닥뜨린 것은 기적이 아니라 살인을 위해 히치하이커를 노리는 연쇄살인마 커플이다. 


안토니오 캠포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2020년


그러나 영화는 그즈음에서 종교에 대한 질문을 멈춘다. 그리고 실체가 있는 ‘악마들’에게 총구를 겨눈다. 신앙심을 이용해 소녀들을 꼬드겨 성적으로 유린하는 프레스턴 목사와, 젊은 남성들의 알몸을 사진 찍은 후 잔혹하고 변태적으로 살해하는 핸더슨 커플은 의심과 구제의 여지가 없는 악인으로 그려진다. 어빈이 프레스턴 목사를 죽인 것은 표면적으로는 어빈의 이붓 동생, 레노라(일라이자 스캔런)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복수지만, 그 복수의 성격은 거의 공익적 행동에 가깝다. 그 이후 어빈이 행하는 일련의 비자발적 ‘살인’들도 마찬가지다. 공권력이 극도로 부패했을 때 영웅적 개인이 나타나 법 대신 ‘총’으로 정의를 행사한다. 그런 면에 있어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선악이 뚜렷이 구분된 지극히 미국적인 히어로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반대되는 또 다른 복수극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의 악인들이 죽을 때 관객이 온전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복수는 나의 것> 속 인물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시원함’보다는 ‘안타까움,’ 혹은 ‘서글픔'에 가깝다. 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복수의 가장 중점이 되는 인물, 동진(송강호)과 류(신하균)가 우리와 너무나 닮은, 평범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류는 곧 자신의 전 재산(천만 원)과 신장을 훔쳐 갈 장기밀매 업자가 주사로 마약 놓는 것을 도와줄 정도로 순진하며, 동진은 ‘원한을 산 사람 없었냐’는 형사의 물음에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할 정도로 큰 악행 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상황이 실타래처럼 엉망으로 꼬여 이제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잘라내는 것밖에 도리가 없을 때, 두 개인이 공공의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복수를 위해 서로에게 죽음의 칼을 겨눌 때, 이들의 복수는 더없이 처절하고 원초적이며 개인적인 것이 된다. 


박찬욱, <복수는 나의 것>, 2002


부조리를 바로 잡는 단죄 같은 복수와, 그 자체로 부조리한, 슬픈 농담 같은 복수. 결이 다른 복수 영화 두 편을 보며 올해 추석 연휴도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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