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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주영 Nov 29. 2020

트렌드 사색 - 젠더리스(Genderless)

취향과 정체성 사이, 그 어딘가에서.

한 때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도시를 뜻하는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과 이성애자를 뜻하는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l)’이 결합된 신조어로, 도시에 살며, 트렌드와 ‘나 자신’을 꾸미는 데 관심이 많은 남성 부류 일반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이들은 동네 미용실이 아닌, 비싼 ‘헤어 숍’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어디까지나 같은 말이지만), 비비 크림을 바르며, 멋있을 수 있다면 다소 타이트한 의상을 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적어도 당시 미디어가 묘사하는 그들은 그러했다. 화장품 회사들은 너도나도 메트로섹슈얼의 시대에 대해 논하며, ‘남성 뷰티’라는 새로운 시장 앞에 들떠 남성만을 위한 스킨케어 라인을 내놓았고, 좀 더 과감한 이들은 ‘남성 전용’ 비비 크림을 출시하기도 했다. ‘이제 남자도 꾸미는 시대.’ 당시 마케터들의 시장 조사 문서에 그런 문구는 필히 한 두 개쯤 들어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메트로섹슈얼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게이가 아닌 이성애자 남성이 자신을 꾸미는 것이 특별한 명칭을 붙인 하나의 현상(Phenomenon)으로 간주될 만큼 흔하지 않다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담겨있다. 미디어가 묘사했던 ‘메트로섹슈얼 스타일’도 패션과 뷰티에 관심이 많은 남성들을 포괄하기엔 너무 협소했다. 이성애자 남성이 전보다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고 패션 뷰티 시장에서 소비할 준비가 되어있다한들, 이들이 모두 한 가지 취향을 가지고 있진 않지 않은가.


2005년 백상예술대상 시삭식. 강동원과 조인성의 의상을 보면 당시 '메트로섹슈얼' 룩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 수 있다.


메트로섹슈얼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난 후, 2000년대 후반부터는 ‘힙스터(Hipster)’라는 존재가 수면 위로 등장했다. ‘힙스터’란 무엇인가. 사람의 부류를 지칭하는 밈(meme)이 대개 그렇듯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사전적 정의는 없지만, 나는 그들을 ‘대중적 유행과 타협하지 않고 본인의 취향을 되려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이 표방하는 취향이 독특하고, 흔하지 않을수록 즐거워하는 듯도 보인다. 인터넷으로 편하게 음악을 듣는 대신 바이닐 레코드를 구매해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는다. 스타벅스 대신 ‘오가닉’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신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거의 늘 올리버 피플스나 모스콧 뿔테 안경을 쓴다. 힙스터 또한 메트로섹슈얼만큼이나 통상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자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힙스터가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꾼 지점이 있다면 이들이 ‘개인의 취향’을 전면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더 이상 최첨단 유행을 따르는 것은 쿨하지 않다.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개발하고, 드러내는 것이 멋이 되었고, 우리는 ‘취향’이라는 단어 자체를 이전과는 다르게 소비하기 시작했다. 취향은 단순한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그의 정체성과 가치관, 라이프 스타일까지 포괄하는 단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확고한 취향이 없는 힙스터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존재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진은 "How to Spot a Hipster" 책의 표지.


사회적 · 신체적으로 부여받은 조건보다 개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강조하는 것이 조금 더 용납되는 사회가 되었을 때 젠더리스(Genderless) 트렌드가 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경제적 자본 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사람이 옷을 입고 스스로를 꾸미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젠더’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핑크색, 남자는 파란색’이라는, 이제는 논하기도 지겨운 사회적으로 부여된 성별의 색상뿐만 아니라, 치마를 입는지 바지를 입는지, 옷에 장식적인 요소가 많은지 적은지, 액세서리를 얼마나 하는지, 화장은 하는지, 굽이 있는 구두를 신는지 등 다양한 인간의 외형적 자기표현에 젠더는 영향을 미쳐왔다. (한 국내 항공사가 여성 승무원에게는 바지를 ‘기본 유니폼’으로 지급하지 않으며, 개인이 바지를 신청하더라도 눈치를 주고 신청 사유를 물어보는 관행이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국내외 미투(#Metoo) 운동으로 촉발된, 페미니즘과 젠더에 대한 담론의 확산도 젠더리스 트렌드가 시작되고 유지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동안 당연시되어왔던 외모에 대한 성차별적 인식을 사회적으로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부 여성들은 여성에게만 과도하게 부과되는 꾸밈 노동을 거부하며 ‘탈코르셋’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해서 그런지, 젠더리스 트렌드의 한 축을 이루는 스타일은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은,’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한 모습이다. ‘국내 최초의 젠더 뉴트럴 뷰티 브랜드’로 등장한 라카(LAKA)는 채도가 있는 색상 대신 흰색 패키지에 세리프 로고를 사용해 모던하고 간결한 느낌을 주었고, 메이크업을 한 남성과 여성을 모두 모델로 등장시켰다. 기존에도 넉넉한 점퍼나 블레이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스웨트셔츠 등 '유니섹스(Unisex)' 옷을 선보이는 캐주얼 패션 브랜드는 많았지만, J.W. 앤더슨의 메이드 인 브리튼(Made in Britain) 컬렉션처럼  남녀 모델이 사이즈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동일한 의상을 입고 룩북을 촬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페라리 블루나 디올 쟈도르처럼 극도의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강조했던 메이저 향수 브랜드들도 ‘중성적인’ 향수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제품 카테고리와 상관없이 남성 · 여성 모두의 메이크업 룩을 보여주는 라카. [이미지 출처: 라카 공식 홈페이지]


입생로랑의 향수, 리브르(Libre)는 여성 향수로 분류되지만, 일반적으로 향수에 사용되는 여성적인 향과 남성적인 향을 전복적으로 사용했다. [이미지 출처: YSL 뷰티 홈페이지]


그러나, 젠더리스 트렌드의 본질이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의 개성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표현할 권리에 있다고 했을 때, 나는 젠더 뉴트럴보다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를 표방하는 브랜드가 많아지길 기대한다. 뉴트럴하지 않은 젠더리스 스타일의 대표적인 브랜드는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가 전개하는 구찌(Gucci)다. 2015년부터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유임한 미켈레는 남성복과 여성복으로 나누어져 있던 쇼를 하나로 합치고 프릴, 레이스, 플라워 패턴 등 주로 여성복에서만 사용되었던 디테일을 남성복에도 확장했다. 그는 최근, 기존에 존재하던 남성복과 여성복 카테고리에 더해 개인의 자기표현을 존중하고, 특정한 성별만을 위해 한정되지 않는 구찌 믹스(Gucci MX¹)라는 구매 섹션을 구찌 웹사이트 내에 만들기도 했다.


2016 S/S 구찌 백스테이지. [이미지 출처: 데이즈드 매거진]
구찌 미국/유럽 웹사이트에 있는 'MX' 카테고리. 아쉽게도 구찌 코리아 공식 웹사이트엔 여전히 '남성복'과 '여성복' 카테고리만 존재하고 있다.


과거에도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프린스(Prince), 믹 재거(Mick Jagger)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딱 달라붙는 부츠컷 팬츠에 배꼽이 보이는 티셔츠를 입은 남성도 멋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구찌가 보여준 로맨틱하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은 락스타가 아닌 대중까지 화려한 패턴의 재킷이나 풍부한 결감의 벨벳 팬츠를 원하게 만들었다. 북미에서 활발히 논의된 '해로운 남성성(Toxic Masculinity)²’에 대한 담론도 이러한 패션 뷰티 트렌드의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과거에 ‘남자답다’고 여겨졌던 속성(과묵하고, 외모에 관심이 없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터프하고, 권력을 추구하는)을 추구하는 대신, MZ 세대는 자신의 취약함, 감정, 취향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존중하기를 선택했고, 그게 더 쿨한 것이라 믿는다.



제가 생각하는 남성성은 아름다움이에요. 당신이 아름다워지길 원한다면 그게 어떤 모습이든 아름다워질 수 있어요. 성별은 상관없죠. (구찌의 옷들은) 당신이 되겠다고 선택한 사람이 될 자유를 줍니다.



물론, 아직 젠더리스 트렌드가 우리의 일상까지 깊숙이 들어온 것은 아니다. 배우 봉태규가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입은 톰 브라운의 스커트를 보고 한 기자는 ‘선을 넘는 패션’이라는 제목으로 봉태규의 사진을 게재했다. 단순히 ‘워스트 드레서’의 예시이자 연예 프로그램의 가십거리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봉태규는 개인 인스타그램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화제가 되었던 봉태규의 톰브라운 스커트. [이미지 출처: 머니투데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너무 편하더라고요.
진작 입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라도 치마의 실용성을 알았으니 다행이죠. 더불어 스타일링했을 때 멋지더라고요. 지금까지 바지라는 한정된 아이템만 입고 살아서인지, 치마는 놀라울 정도로 신선하고 멋졌어요.
어떤 경계가 사라진다는 건 개인에게 놀라울 만큼의 자극을 주고 새로운 우주가 펼쳐지더라고요. 언젠가 교복을 조금 더 자유롭고 편하게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뜻에서 여학생들에게 치마 대신 반바지나 긴 바지를 허용하자는 얘기가 있었지요.
이제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굳이 치마만을 고집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 시하도 교복을 입게 된다면 선택 사항에 치마가 있다면 어떨까 싶어요.
치마를 입든 입지 않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에게 중요한 것들을 알려주는 게 되니까요. 저는 이제야 그것들을 배우게 되었지만 우리 시하는 저보다는 조금 더 빨리 알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남자도 치마 입을 수 있어. 심지어 아주 멋지단다."



‘치마를 입든 입지 않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에게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젠더리스 트렌드가 전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여자인데 ‘선머슴처럼’ 머리가 짧든, 펑퍼짐한 바지를 입든, 남성인데 ‘게이처럼’ 색깔 있는 립틴트를 바르든, 리본이 커다랗게 달린 블라우스를 입든, 그것이 개인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방식이라면 다른 젠더에 그를 빗대지 않고 그 사람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 그래서 ‘젠더리스’라는 트렌드가 더 이상 트렌드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다양한 아름다움의 모습이 특정 성별에 귀속되지 않는 미래를 그려본다.





¹MX: 믹스(Mx.)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에 포함되지 않는 논 바이너리(Non-binary) 젠더의 경의어로도 사용된다. 가령, 논 바이너리로 본인의 성 정체성을 정의하는 가수 샘 스미스(Sam Smith)를 Mr. 나 Ms. 대신 Mx. Sam Smith라고 부를 수 있다.

²해로운 남성성(Toxic Masculinity):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남자답다’고 지칭하는 속성 중 남성 본인과 여성, 그리고 사회에 해롭다고 여겨지는 특성을 말한다. 이는 남성이나 남성성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상적인 남성’에 대한 편협한 시각과 사회적 굴레가 개인의 심리와 사회에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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