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팝의 유행과 함께 여기저기서 이것은 시티팝이다 아니다로 설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해를 돕고자 일본 시티팝 가이드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혼자 보려고 대충 적어 놓은거라 글씨가 엉망이지만, 다 읽어보실 필요는 없으니 그대로 업로드 했습니다.
1. 여명기 1970~1975
먼저 시티팝의 여명기 입니다. 더 타이거즈로 대표되는 일본의 GS(그룹사운드)는 모두 영어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시엔 락음악을 어떻게 일본어로 부르냐는 인식이 있었는데, 핫삐엔도 (Happy End)는 여기에 반감을 갖고 최초의 자국어 락음악을 하게 됩니다. 굳이 밴드명을 히라가나로 적은 것도 그러한 이유였습니다. 시티팝 역사에서 늘 가장 먼저 등장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 포크락의 느낌이 강하다고 느껴져 공감이 되지는 않는데, 반대로 이 밴드를 빼놓고는 시티팝을 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밴드의 멤버 중에 한 명인 오오타키 에이치는 훗날 "나이아가라"라는 시티팝 대표 레이블을 만들게 됩니다. 야마시타 타츠로가 소속되어 있었던 슈가베이브가 바로 이 레이블의 소속이었습니다. 자켓만 보고도 이거 시티팝이구나 하는 많은 앨범들이 나이아가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멤버인 호소노 하루오미는 틴판앨리로 활동하다 훗날 류이치 사카모토와 전설의 테크노 그룹 YMO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시티팝의 시작은 이 앨범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슈가베이브의 멤버로는 야마시타 타츠로와 오오누기 타에코, 이토 긴지 등으로 이후에도 핫삐엔도 만큼이나 두고두고 회자 됩니다
https://youtu.be/gdJKSlJDARQ?si=6J1K0viVnDOZ0Gr8
한편 더 타이거즈의 멤버였던 카하시 카츠미는 아라이 유미를 발굴합니다. (결혼 후 마츠토야 유미) 국내에서는 마녀배달부 키키의 OST에 참여한 부른 가수 정도로알려져, 다케우치 마리야에 비해서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본격적인 활동 기간 동안 매년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하고 공연 횟수 오리콘 순위 등으로 봤을 때 시티팝 씬에서 독보적으로 큰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집에 코러스로 참여한 아티스트들 살짝 들여다보면.... 요시다 미나코, 야마시타 타츠로, 오누키 다에코까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어릴적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중학생 때부터 아티스트들의 아지트인 레스토랑 챤티에 드나들며 아티스트들과의 교류가 많아 유밍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대표적인 금수저 출신 아티스트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버블시대 "중산층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으로 평가되는 중산층의 로망을 대표하는 가수 아티스트 였습니다. 당시 음반 수익은 모두 팬들과 함께 꿈을나눠야 한다며 공연에 억단위가 넘는 투자를 하여 공연에 30미터가 넘는 용을 타고 등장하거나, 실제 코끼리, 분수, 마술쇼, 엘리베이터 등이 등장하는 엄청난 공연 투자 규모로 유밍월드를 확고하게 구축합니다. 개인적으로 격한 율동에 비해 다소 기운 없이 부르는 애띤 보컬이 맘에 들지않았는데, 오히려 후기에 발표한 앨범들의 보컬이 따뜻하고 친근하게 들립니다. 국내 가수로 MC스나이퍼, 임형주 등과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는 등 꽤 최근까지도 광폭 횡보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룹사운드 위주의 음악이 유행하면서 슈가베이브는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기고 해체하게 됩니다. 이후 야마시타 타츠로는 솔로 데뷔 앨범 Circus Town을 오오누기 타에코는 Grey Skies를 발표합니다. 야마시타 타츠로의 음악에 대해서는 수차례 언급되기에 간단히 데뷔 앨범만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https://youtu.be/mCfizrJ5oCk?si=ZePs5mFmZ9DnHpFC
이듬해 1977년 발표한 "도회"가 삽입된 오오누키 타에코의 Sunshower 앨범은 현재까지도 수차례 재발매 되고 고가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8O8m36Jr1Uk?si=2cgh7kzgt19Ysqs5
슈가 베이브의 또 다른 멤버였던 이토 긴지의 Deadly Drive 입니다.
https://youtu.be/bcGPdjT1Ohg?si=QvVtac-OSJd9X_2n
21세기 시티뮤직을 표방하는 류센케이의 앨범 자켓은 뇌피셜리 이토긴지의 이 자켓을 오마쥬 한게 아닐가 생각합니다.
https://youtu.be/1mheZTVqkGI?si=2-5iMMS6qObOwXAM
다음은 요시다 미나코 입니다. 호소노 루오미의 권유로 음악을 시작하여 오오타키 에이이치 솔로 앨범에서 플루트 솔로로 경력을 시작합니다. 카도마츠 토시키가 경외하는 인물로도 밝힌 요시다 미나코는 탁월한 작사/작곡 능력으로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곡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작곡 보다 작사가 힘들다고 고백했던 야마시타 타츠로 전성기 앨범의 대부분의 작사자와 코러스로 참여하고 밴드 공연시에도 늘 코러스로 함께했습니다. 결혼은 타케우치 마리야와 함께 했으나, 실제 전성기 시절 음악의 동반자는 이 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디스틱 미카 밴드 입니다. 일본 전설의 퓨전 기타리스트 다카나카 마사요시의 합류 이후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등과 작업했던 거물급 프로듀서 토마스 크리스의 도움으로 "흑선"이라는 앨범을 내게 됩니다. 일본 내에서는 별다른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으나, 영국에서 먼저 인기를 끌게 되어 "록시뮤직"의 투어 오프닝 밴드를 담당하며 다시 일본으로 음반이 역수입 되었다고 합니다. 해산 후 사카모토 류이치, 마츠토야 유미와 함께 "사디스틱 유밍"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시티팝 초창기에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도 못했고 다다미 포크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70년 후반까지 고도 성장기의 엄청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외 디렉터, 뮤지션들과 탄탄한 세션을 구축하고 다양한 장르가 뒤섞이게 됩니다. "냉전시대 일본은 미국의 보호아래 국방비를 모두 음악을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말이 격하게 공감되는 부분 입니다.
한 편에 소개를 끝낼까 했는데, 호흡이 길어져 여러편으로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역이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따끔하게 지적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