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소리 그리고 한
거장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서편제’는 개봉 당시(1993) 서울에서만 백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사의 흥행 기록을 경신한 작품이다. 외화를 제외하고 천만 관객을 돌파한 우리 영화만 스무 편이 넘는 지금은 백만이 우습지만 당시는 단관 개봉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백만은 오늘날의 천만 이상의 가치가 있는 대단한 숫자다. 요즘 분들을 위해 좀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단관 개봉이란 한 영화를 한 곳의 극장에서만 독점적으로 상영하는 것을 말한다. 더구나 당시는 멀티 스크린 시대도 아니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0년대
수양 딸 송화를 데리고 남도 여기저기를 떠돌며 소리 품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유봉(김명곤)은 금산댁을 만나 정을 통한다. 그러나 출산 중에 금산댁이 사망하고 유봉은 그녀의 어린 아들 동호를 떠맡는다.
이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송화와 동호는 유봉에 의지하여 친남매처럼 지낸다. 유봉은 송화(오정해)에게는 소리를 가르치고 동호(김규철)에게는 북채를 쥐어준다.
비록 세상이 천대하는 소리꾼이긴 하나 유봉은 소리를 통해 한을 풀어내는 재인(才人)이었다. 한이란 무엇인가? 유봉은 송화에게 살아가는 것은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바로 살아가는 것이라 하였다. 결국 유봉에게 있어 소리란 한을 넘어서는 것이라야 했다.
문제는 소리로 한은 넘어서더라도 삶을 풀어낼 수는 없음에 있었다. 유봉 때문에 자신의 어미가 죽었다고 생각하던 동호는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유봉으로부터 도망치고 만다. 그만 한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동호가 떠난 뒤 송화마저 자신의 곁을 떠날까 근심하던 유봉은 독성이 강한 약재인 부자(附子)를 달인 한약을 송화에게 먹여 그녀의 눈을 멀게 한다. 그렇게 되면 눈으로 갈 정기가 귀와 목청으로 뻗쳐 득음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송화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던 유봉은 숨지기 직전 자신이 고의로 눈을 멀게 했음을 송화에게 고백한다.
세월이 흘러..
약방의 직원이 된 동호는 약재를 구하러 남도에 왔다가 송화를 찾는다. 긴 기다림과 그리움 끝에 드디어 영광의 어느 주막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소리와 북 장단을 맞추며 서로에게 쌓인 한을 풀어 간다.
알려졌다시피 서편제는 오리지널 각본이 아니라 이청준의 연작소설인 ‘남도사람’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다. 남도사람의 첫 작품이 서편제인데 영화는 바로 첫 작품의 제목을 사용한 것이다.
영화와 소설이 크게 다른 점은 송화와 동호의 관계다. 영화에서 송화와 동호의 관계는 완전한 남남이다. 즉 동호가 어미인 금산댁과 유봉에게 의탁하기 전에 이미 송화가 있었던 것이다. 송화와 유봉의 관계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친딸은 아니다. 아마도 유봉에게는 금산댁과 같은 여인들이 더러 있었을 것이며 송화는 그 누군가가 남긴 여식일 것이다.
그러나 원작에서 동호와 송화는 모두 금산댁을 어미로 한 동복 남매다. 소설에서도 금산댁은 출산 끝에 사망을 하는데 이때 태어난 여식이 송화로서 따라서 송화는 유봉의 친딸이며 영화와 달리 동호가 송화의 오빠다.
유봉이 송화의 눈을 멀게 하는 방법도 원작 소설과 영화가 다르다. 원작에서는 유봉이 송화의 눈에 청강수를 찍어 넣어 멀게 만드는데 영화는 독성이 강한 부자를 달인 한약을 송화에게 먹게 하는 것으로 설정이 바뀌었다.
원작에서는 친 부녀간인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복 남매인 송화와 동호의 관계를 영화에서 남남으로 설정한 것은 유봉 – 송화 – 동호를 삼각관계로 설정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유봉은 송화에 대한 강한 집착심에서 그녀를 장님으로 만들었으며 유봉에게 어미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동호는(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에서는 동호가 유봉을 죽이려 한다) 세월이 흐르고도 송화를 잊지 못해 그녀를 찾아 남도 전역을 헤맨다.
영화에서 유봉이 송화에게 그리고 동호와 송화가 서로에게 욕정을 느끼는 장면은 직접적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다만 유봉이 송화의 머리를 빗질하는 장면과 영광의 주막에서 재회한 동호와 송화가 밤새 장단을 맞추며 소리를 하는 장면을 통해 그것을 짐작할 뿐이다.
영화 ‘서편제’는 서편제 – 소리의 빛 – 선학동 나그네 – 새와 나무 – 다시 태어나는 말로 구성된 연작소설 남도사람 가운데 서편제와 소리의 빛을 섞은 것이다. 선학동 나그네는 이후 ‘천년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권택 감독의 1백 번째 영화로 탄생했다.
소리하는 누이를 찾아다니는 남자의 이야기는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작품인 ‘다시 태어나는 말’에도 살짝 나온다. 여기서 원작자인 이청준은 남도소리는 한을 쌓는 소리가 아니라 한풀이 가락이라 정의한다. 동호가 끝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물론 송화는 익숙한 북 장단이 동호의 솜씨임을 직감했겠지만) 송화의 곁을 물러난 이유일 것이다.
202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