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영화 이야기, '카모메 식당'
영화과를 졸업했다. 낯선 이는 "오, 배우가 꿈?"이라고 물어왔지만, 그저 영화가 좋아 영화 공부하기를 결심했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나는 영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 꿈에 대한 배반이었지만 영화 학도인 나에게도 영화판은 녹록지 않았다. 감독이 되어 입봉? 10,000명 중의 1명 탄생할리 만무한 일이었고, 잘 나가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려면 족히 5년은 넘게 걸릴 터였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화에 몸 담기를 포기했다. 사실 그 만큼의 열정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후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시간 맞춰 출근하고, 밥먹듯 야근하는 삶. 모두가 그렇듯 매일같이 반복되는 거친 일상에 지쳐갔다. 누군가는 친한 이와 만나 술을 마시고 누구는 쇼핑을 즐기고 누구는 직장인 동아리에 들어가 회포를 풀었을 일상. 난 매번 같은 영화 한 편을 꺼내 보곤했다. 영화일을 하고 있지 않았어도, 예나 지금이나 영화 한 편에 울고, 웃게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막연히 울고 싶을 때, 위로 받고 싶을 때면 이 영화를 틀었다. '카모메 식당'
그 따뜻한 식사 한 끼, 내게도 필요한데..
영화 카모메식당은 각자의 행복을 찾아 핀란드로 떠난 일본 여자 세명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그곳에서 작은 일본 식당 '카모메'를 운영하는 여자, 사치에로부터 시작한다.
매일 파리만 날리던 그녀의 식당에 어느날 한 핀란드 청년 '토미'가 찾아 온다. 제법 익숙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청년. 그녀의 유일한 손님이 된 그에게 사치에는 매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무료로 내어주며 그들은 친해진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토미. 토미는 그녀에게 일본 애니메이션 '갓차맨'의 주제가 가사를 묻고, 도통 생각나지 않는 갓차맨의 가사를 떠올리며 사치에는 핀란드의 이곳 저곳을 거닌다.
그때, 우연히 또 다른 일본 여자 미도리를 만났다.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어디로 떠날 것인지 결정했다는 미도리. 딱히 핀란드로 와야 했던 이유는 없었지만 떠나야만 하는 이유는 충분했던 그녀였다. (핀란드가 아닌 그 어떠한 곳이었어도 꼭 떠났을 거라고 말하는 그녀의 대사에서 일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그녀의 사연을 엿볼 수 있다.)
무작정 핀란드로 떠나온 미도리에게 자신과 함께 지낼 것을 권유한 사치에.
그녀는 미도리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데 그 메뉴가 모두 소박한 일본 가정식 메뉴다. 사치에는 '핀란드에 와서 이런 것을 드시게 해 죄송하다'고 말하지만, 이내 밥 한술을 입에 넣은 미도리가 눈물을 흘린다.
눈물의 의미는 뭐였을까? 타향에서 맛 본 고향 음식, 어쩌면 그리운 엄마의 집 밥에 대한 기억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와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의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짐작할 뿐.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 그녀였지만 낯선 땅 핀란드에서도 역시나 외로웠던 미도리. 사치에의 따뜻한 식사 한 끼는 그녀를 말 없이 위로 했다.
서툰 마음이라도 고마워
핀란드에서 머무는 동안 미도리는 카모메 식당의 일을 돕기로 한다. 청소를 하고, 서빙을 하는 그녀. 영화 내내 투박하고 터프한 성격으로 그려지는 그녀이지만 그녀의 진심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바로 그녀가 카모메 식당의 메뉴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다.
생선 요리 옆에는 물고기를 그리고, 돼지 고기 요리에는 돼지 그림을 그려 넣는다. 덩치 좋은 미도리가 곱게 앉아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려 넣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말 없이 자신을 품어준 사치에를 향한 고마운 마음을 서툰 그림으로 표현한 것 같아 그 마음이 더 사랑스럽게 와닿았던 것 같다.
사치에는 그녀의 서툰 마음을 통해 어쩌면 '고맙다'는 말보다 더 맘이 따뜻해지는 순간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숲을 보고 하늘을 바라볼 여유
일본 영화답게 역시나 잔잔-한 느낌의 카모메 식당. 그래도 중간 중간 튀어 나오는 일본 특유의 엉뚱함은 어쩔 수 없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었던 건 마사코의 이야기.
수년의 시간을 부모님의 병수발을 하며 지낸 마사코는 어느 날 TV를 보다가 핀란드에 매료되었다. 정확히는 여유로운 핀란드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다. 결국 핀란드 행을 선택한 그녀. 무사히 도착한 그녀였지만 항공사의 실수로 수화물을 잃어 버렸다. 며칠 이내에 되찾을 줄 알았던 짐은 시간이 가도록 감감무소식.. 그녀는 점점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잊는다.
오랜 시간 누군가를 위해서만 살아왔던 마사코. 그녀의 따스함은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지만 스스로의 안녕은 돌보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나 평온한 듯한 핀란드 사람들의 행복의 근원이 궁금했다.
그때, 카모메 식당의 단골 손님 토미가 한마디 말을 보탠다. "숲 때문이에요"
그 즉시 숲을 찾아 떠난 마사코. 열심히 버섯을 따다가 문득 불어온 바람에 하늘을 올려다 본다. 바람을 따라 나뭇잎이 일렁이고 새가 날아간다. 그러다 이따금씩 나무 사이로 환한 햇빛 줄기가 내리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사코가 무언가 깨닫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무엇을 잃어가는지 조차 잊고 살았던 마사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을 보고, 숲을 느끼는 그런 여유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마지막, 소울 푸드
카모메식당의 주인 사치에의 작은 위안은 오니기리였다. 바로, 소울푸드. 어릴적 엄마를 여읜 사치에를 위해 그녀의 아버지는 매년 한 번, 그녀의 운동회날에 투박한 솜씨로 오니기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친구들의 도시락처럼 화려하진 않았어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는 사치에. 그녀에겐 투박하지만 아버지의 진심이 담겨 있던 그 소울 푸드, 오니기리가 그녀를 살게하는 원천이었다.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즐길 때의 그 행복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녀.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카모메식당의 손님들을 통해 위안 아닌 행복을 얻는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누구에게나 마음이 지치는 날이 있다. 어떤 사건이 터져 그 화산에 마음이 덥혀지듯 그렇게 힘든 날 말고, 그저 그렇고 그런 날 말이다. 하지만 지친 마음에 이유가 없을리 없다. 누군가에게 상처 받은 마음일수도, 혹은 스스로에게 낙담했을 마음. 한 동안을 스스로 삭히다 단단히 굳어진 마음이 어느 날 뻐근하게 지친 것처럼 느껴지는 날일 수도 있다.
카모메 식당에는 고마운 마음이 있고, 배려가 있으며 따뜻한 위로가 있다. 마음이 지치는 순간 카모메 식당을 찾아 보는 이유다.
사실,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는 주인공 세 여자의 과거 사연은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다. 어떤 아픔을 가진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그녀들은 각자의 공허함과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도전하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여느 액션 영화처럼 스펙타클하진 않아도 '스스로' 그 행복에 닿아간다는 점에서 내겐 큰 힘이 되는 영화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카모메 식당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다. 사치에처럼, 순간의 스스로에게 오롯이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이 영화를 볼 때면 항상 이런 생각을 했고, 편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