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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Jun 01. 2021

"아이들의 일기는 왜 짧은 걸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졌던 "언어의 영양실조"

 중학생이 되고 나서, 좋은 점은 손에 꼽았다. 수요일에도 일찍 학교를 떠날 수 없었고, 학습 진도와 숙제의 양은 말도 안 되게 늘어났다. 특히 잠이 많은 나에게 이른 등교시간은 벌칙과도 같았다. 그러나 하나 좋은 점이 있었다면,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매번 개학식 전날, 기상청의 날씨 기록을 검색해가며 날씨를 적고 나도 모르는 내 과거를 집어넣어야 했던 곤란함으로부터 해방되는 건 큰 짐을 덜어낸 느낌이었다. 제일 귀찮은 업무가 떨어져 나갔다(지금의 학생들은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일기를 미루지 않던 에도 여전했다. 개학식 이후 정말 가끔 “오늘부터     일기를 써야지.”라고 결심했다. 그런데 마음먹고 오늘의 일기를 쓰려고 해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무엇을 써야 하는 걸까? “기억이 말짱해도 일기에 무슨 내용을 적어야 하지?” 결국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도 5줄을 꾸역꾸역 채운다. ‘오늘도 너무너무 즐거웠다등의 클리셰를 넣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다음 날부터 ‘ 날의 일기계획은 폐기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일기가 짧은 이유는 단지 기억이  난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럼  이유를 찾아가보자.



 어린 시절의 일기를 회상하거나, 직접 꺼내 읽어보면 알겠지만, 어린이의 일기는 대개 길지가 않다. 그럼 아이들이 느끼는 바가 어른들보다 적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신체 감수성은 평범한 어른들보다 훨씬 풍부하다. 어디를 가도 아이들은 마치 모험을 하듯이 탐방한다. 아이들에게 비교적 새로운 이 세상은 너무 신기하고, 자신의 작은 몸집에 비해 너무 커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기가 짧은 이유는 일기가 숙제라서 하기 싫거나, 어린 시절의 나처럼 미뤄서 기억이   때도 있지만,  다른 이유는 아이의 말에  힌트가 숨어 있지 않을까. 부모와 아이의 상황극을 상상해보자. 일기장 위에  글자도 적지 않는 아이에게 부모는 말한다. “일기를   쓰는 거니?” “그게 아니라요,   없어요.” “무슨 말이야?   없다니?” “정말이에요. 정말   떠오르지 않아요.” ‘  없다 말은 무슨 뜻일까? 나의 고등학생  대학생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극을   길게 끌어가보자.



 아이는 고등학교에 들어서고 나서야, 논술을 접하기 시작한다. 논술수업을 듣고 나서, 일기를 지나 번듯한 글쓰기를 해보았다. “글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글을 읽어본 적만 있지. 써 본 적 없던 고등학생은 눈 앞이 캄캄했다. 글의 구성은 알려줬지만, 어떻게 글을 이끌어가야 하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객관식과 단답형으로 세상을 봤던 고등학생에게 글쓰기는 별나라 이야기였다. “대학교 가면 달라지겠지” 그렇게 고등학생은 안일하게 생각했다.



 현실은 예상과는 반대였다. 대학교 1학년에 배우는 글쓰기 필수교양을 시작으로 대학생은 5페이지 이상의 장문을 쓰는 시련을 처음으로 맞이한다. 더구나 보고서와 전공 시험까지 백지에다가 글을 쓰라고 하다니... 대학생은 패닉에 빠진다. “글쓰기 연습할 걸”이란 말만 되뇌이지만, 읽고 외우기만 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쓰기가 될 리가 없었다. 항상 ‘주제와 의도를 파악하는’ 연습만 했지, ‘주제와 의도까지 안내하는’ 연습은 안 했기 때문이다. 대학생 이후에도 글쓰기의 유령은 이름을 바꿔가며 괴롭힌다.



 

  처참한 상황극은 이 정도에서 끝내자. 내게 글쓰기의 전환점은 대학생 후반 시절의 ‘독서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심심한 게 이유였지만, 같은 책을 읽고 여러 의견을 듣고 이야기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연습이자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들이었다. 특히 도움이 되었던 순간은 “나는 읽었지만 상대방이 읽지 않았던 책과 의견”을 전달해야 했을 때였다. 내가 안다고 짐작했지만, 막상 대화해보니 논리가 단절되고 말이 막히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는 “머뭇거림” 속에서 논리와 말은 점점 나아간다. 나는 이미 아는 것을 말하고 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말하고 쓰는 행동으로 나는 내가 아는 것을 확인한다. 알고 느끼는 것과 말하고 쓰는 것은 그 순서가 역전되어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느낀다 해도, 그것이 언어의 옷을 입지 않는다면 상대방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정리되지도 각인되지도 않는다. 극단적이지만 대표적인 사례가 “학대와 억압”이다. “학대와 억압”은 아동의 경우 주로 피해자의 고백보다 외부인의 고발로 드러난다. 피해자들은 사건 당시에 자기 자신이 “학대와 억압” 상태에 처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피해자들은 그것을 “학대와 억압”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느끼지’ 않는지는 사연이 조금 길다.



 피해자들은 “학대당했다 혹은 억압당했다”는 말을 외부인에게 듣지 않고서는 자신의 경험을 가해자가 말한 것처럼 '애정과 관심’으로 느낀다. “학대와 억압”은 겪은 순간에 눈치채지 못한 채 나중에서야(사후적으로) 확인받는다. 피해자는 “학대와 억압”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래서 “학대와 억압”의 언어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은 피해자의 눈을 가리며 피해자의 인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라든가,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이라든가, 쇼샤나 펠만의 글은 여성의 “언어”를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자기 자신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새로운 “언어”를 얻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마침 “학대와 억압”에 대한 예시를 꺼냈으니, “학대”의 “언어”로 새롭게 읽은 책을 하나 이야기해보자. "학대"를 다룬 책은 너무나 유명한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거든.’의 <어린 왕자>가 맞다. 야스토미 아유미는 책 <누가 어린 왕자를 죽였는가>에서 어린 왕자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살인 사건’이라는 대담한 해석을 시도한다. 범인은 ‘장미’와 ‘여우’. 사인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학대, “모럴 해러스먼트”다.



 흔히 해러스먼트는 성희롱(Sexual harassment, 섹슈얼 해러스먼트)에서 듣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해러스먼트를 ‘괴롭히다’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어로 넘어가면 뜻이 추가된다. 프랑스어 harceler는 사냥에서 쓰이는 말로 사냥개가 사냥감을 쫓아다니며 지치게 만들어, 이내 “사냥감의 생명력을 빼앗는 일”을 가리킨다.



 “모럴 해러스먼트”는 사냥개-사냥감의 관계가 대인관계에서 반복되는 상황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친구, 상사, 가족 등에게 한 번은 들었던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야”가 대표적인 대사다. 일상에서 이런 경우 아무렇지 않은 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물론 짜증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문제는 만에 하나 “모럴 해러스먼트”에 빠질 때 일어난다.



 “모럴 해러스먼트”는 ‘선의의 말 속에 숨겨진 악의’의 구조다. 운이 나쁘게도 ‘선의 속 악의’의 마수에 걸려든 피해자들은 자력으로 헤어나올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학대와 억압”의 언어를 얻지 못한 채, "모럴 해러스먼트"를 가해자의 애정과 관심이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선의와 악의를 구분할 수 없는 피해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스라이팅'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피해자들은 “모럴 해러스먼트” 속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가해자들의 말에 묶여 관계의 문제에 대해 끝없는 죄책감을 피해자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다. “이 사람(가해자)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건 바로 내(피해자) 탓이야”는 피해자들의 대표적인 대사다. 상태가 심각해지면 주위 사람들이 무언가 잘못됐다고 말해도 피해자는 가해자를 변호하기까지 한다. 피해자의 보호를 받으며, 한없이 피해자를 학대할 수 있는 가해자, 이보다 더 안전한 완벽범죄는 없을 것이다.



<누가 어린 왕자를 죽였는가>의 주범은 ‘장미’다. ‘장미’는 어린 왕자의 정신을 휘어잡아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드높인다. ‘장미’의 영악함은 장미-어린 왕자의 관계의 모든 책임을 어린 왕자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에 있다. 2차 범인은 ‘여우’는 그 유명한 ‘길들인다’는 말로 ‘장미’의 학대를 은폐한다. ‘장미가 어린 왕자를 길들인다’는 일방적 학대를 ‘장미와 어린 왕자가 상호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거짓으로 뒤바꿔버린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넌 네 꽃에 대한 책임이 있어’라는 말로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누가 어린 왕자를 죽였는가>는 <어린 왕자>를 색다르게 읽는 시도였다. 이렇듯 책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과 또 다른 누군가를 읽는다. 중학생 때 보이지 않던 게 성인이 되고 나서 보이기도 한다. 어린 왕자는 철도원과 이렇게 대화한다. "무척 바쁜가 봐요. 저 사람들(승객들)은 뭘 찾고 있어요?" "그들도 자신이 뭘 찾는지 모르고 있어."



 잠에 취한 상태로, 머리도 다 마르지도 않은 채 출근길에 오르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는 이 장면을 기억한다. 생텍쥐페리가 1900년에 태어난 것을 연관짓는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급행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20세기 전반의 전쟁들과 대공황 등 근대의 부작용 속에서 끌려다니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 장면 속 '검은 연기를 뿜어대는 뱀'으로 묘사되는 열차와 이어져, 생텍쥐페리는 20세기 근대를 비판한 것일 수도 있다.



 읽기와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 순수한 글쓰기 또한 있지 않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 언어를 빌리며 말하고 읽고 쓰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안의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쓰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혼자 생각할 때마저도 언어를 쓴다. 아이들은 이미 일기를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정답을 주고 있었다. “  없다 말은 느낌이 부족하거나 경험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느낌과 경험을 담을 “언어 없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계속 신호를 주고 있었다, 내게 “설명할  가르쳐 달라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빈곤한 경험에 대해 염려하는 움직임은 많았지만, 아이들의 “언어의 영양실조”는 그렇게 드러나지 않았다. 최근 들어 문제시되고 있는 “문해력” 문제는 “언어의 영양실조”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문해력” 문제는 단지 한자교육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단순한 미봉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언어를 통해 교실 밖에 있는 드넓은 세상에 대한 로망을 불어넣어줘야 한다. 인간은 언어의 확장으로 더 넓은 세계와 그 안의 자신의 위치를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언어를 배운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살덩이가 아니라 인간이 된다. 우리의 감수성은 ‘다른 누군가’의 언어를 빌려오고 씀으로써 더욱 섬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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