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시다시피 <두 교황>은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과 전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관계를 다룬 영화다. 나는 일상에서 종교 이야기를 꺼리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종교 이야기를 해서 끝이 개운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종교 이야기에서 타협과 대화의 접점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접점은 찾기가 힘들고, 다른 종교를 갖는 사람들끼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괜찮을까? 고위 종교지도자들은 항상 웃으면서 대화할 수 있을까? 영화 속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호르헤 추기경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영화의 두 주인공은 화성과 금성의 거리만큼 서로 다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잘 사는 북반구 나라 독일에서 태어난 보수적 학자인 반면, 호르헤 추기경은 빈곤한 남반구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개혁적 행동가다. 그들의 가장 큰 질문은 ‘종교계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다. 베네딕토 16세는 혼잡한 세상 속에 교회가 기준과 질서가 되어야 한다고, 호르헤는 교회가 세상과 함께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네딕토 16세에게 호르헤는 포퓰리스트로, 호르헤에게 베네딕토 16세는 관습주의자로 보인다. 정반대의 세계에 사는 두 사람은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느 날, 호르헤는 추기경을 은퇴하고 평범한 신부로 살아가기 위해 교황이 있는 바티칸으로 향한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에게 적대적 위치에 있는 호르헤의 사직서를 수리한다면, 세간에서 정적을 숙청한 것으로 비판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사직서를 거부한다. 그들은 종교계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논쟁하며,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카메라도 두 명의 대립을 알고 있는지, 칼로 잰 듯이 수직과 수평으로만 움직인다. 카톨릭의 고위 종교지도자들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사람을 짓밟는 말을 하곤 한다. 심박 조절 장치를 끼고 환타를 좋아하는 베네딕토 16세와 내전을 다루는 저녁 뉴스를 고민없이 넘기고 축구 경기를 본방사수하는 호르헤는 신부이기 이전에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그런 사람들처럼 대화를 열려고 노력한다. 그 시작은 ‘어떻게 신부가 되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베네딕토 16세와 호르헤의 답은 똑같다. 바로 주님의 ‘부름’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통점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만의 ‘종교적 경험’을 터놓는다. ‘종교적 경험’은 논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편안한 주제면서도, 깊은 감수성을 요구하는 진지한 주제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 뒷모습에 자리한 다양하고 복잡한 인생의 겹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된다. 카메라도 그것을 아는지, 핸드헬드로 찍어내 두 명의 모습이 흔들리며 담아낸다. 각자 인생의 이야기는 서로 달라도, 그들은 ‘부름’을 들은 사람이다.
사실 영화에서 말하는 주님의 ‘부름’을 나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렇다 할 종교를 삼지 않았다. 내게 ‘부름’은 너무 신비한 환상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철학을 읽다 보면, 지나치는 풍경처럼 종교의 메시지를 가끔 만나게 된다. 그래서 무교지만, 아니 무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종교적 과제가 있다. 바로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다리를 어떻게 놓을 것인지를 생각하는 일이다. 한쪽에서 오작교를 만들고자 한다면, 반대편에서도 만드는 것이 더 빠르고 튼튼하지 않겠는가?
영화에서 ‘부름’은 두 교황이 친구가 되는 계기이자, 각자 인생의 결단을 내리는데 중요한 계기다. 또한 현실의 종교(특히, 유일신교)에 있어서 절대적 지침이자, 비종교인에게 거리를 만드는 신비한 경험이다. 그러나 ‘부름’을 듣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성당이 아니라 나는 서점에서 들었다. 서점을 지나치다 보면, 우연치 않게 걸음을 멈추고 하나의 책 표지에 시선이 꽂힌다. 이내 책을 펼치지만 이미 알고 있다, 읽기도 전에 이 책은 바로 살 거라는 걸. 책에 매혹된 채, 바로 집으로 달려가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책”을 만나는 경험이다. 나는 주님의 ‘부름’이 아니라 책의 ‘부름’을 듣는다.
주님의 말씀처럼 무슨 내용이 있진 않지만, “인생책”은 “나를 읽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많이 다른 것 같지만, 두 상황들은 ‘우연한 만남’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대개 “인생책”은 다른 사람이 추천한 책이 아니다. 지나치다가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그 우연이 우리에게 “운명”으로 다가온다. ‘부름’을 들은 일은 우연에서 시작하지만, 우리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냉소적으로 보면, “운명”이란 우연에 기인한 ‘착각’이다. 아주 건설적이고 로맨틱한 ‘착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호르헤의 대사 “우연은 없어요, 다 하나님의 뜻이지요.”는 종교인의 자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호르헤는 그저 주님의 계획에 꼭두각시 인형처럼 수동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종교인의 자세는 이 세상의 모든 우연을 “운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적극적이고 진지한 자세다. 누군가의 ‘부름’을 어떻게든 듣고자 하는 경청의 자세, 비종교인으로서 내가 생각하는 종교인의 자세다. 그렇다면 경청의 자세는 종교를 떠나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자세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유대인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이것을 환대라고 불렀다.
먼저 ‘나’라는 주체가 있고, 다른 것들을 보고 느낀다는 생각이 상식이다. 한때 YOLO가 유행했고, 여전히 ‘나’를 돌보고 ‘나’를 중심으로 하는 힐링과 경험이 인기 있고, 돈이 된다. 몇 년 동안 캠핑이 유행이 된 이유가 그런 게 아니던가? 그러나 ‘나’ 중심의 세계와 반대로 레비나스는 도저히 견딜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 역경에서 ‘나’라는 주체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아브라함의 예시로 주체를 이야기한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주님의 ‘부름’을 듣는다, 그것은 산에서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메시지였다. 아브라함은 ‘부름’을 듣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애로운 주님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는 ‘부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이해되지 않는 ‘부름’을 유일하게 들은 아브라함은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아브라함은 ‘부름’ 그대로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치고자 했다. 그러자 주님이 보내신 천사는 그만두어라고 말씀하셨다.
이 기묘한 이야기를 말하며, 레비나스는 주체란 누군가(타자)의 부름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대답해야 하는 “책임”을 짊어질 때 등장한다고 말한다. 전혀 모르는 말로 나를 붙잡는 외국인을 만나는 일처럼 말이다. 바로 영화 속 호르헤의 비행기표가 “운명”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부름’이었고, 그가 대답해야 하는 “책임”이었다. 호르헤가 “책임”을 짊어질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주체가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에게 “책임”이 권리보다 훨씬 중요하다. 아니, 레비나스에게 더 많은 “책임”은 윤리적 특권이라 봐도 무방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유대인 수용소에서 보낸 레비나스는 선택받은 민족을 기존의 관점에서 뒤집어 생각한다. 선택받은 민족이란 주님에게 더욱 가깝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책임이 당신들보다 더 많다고 한 발짝 앞서 나아가는 것이다, 설령 그 죄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도 말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이스라엘’이라 부른다.
우리는 ‘나’를 제일 아낀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부름’을,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대화하지 않고, 논쟁하는 사람들. 각자의 진실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 벽을 깨고, ‘나’를 흔드는 파도같은 타자를 환대하는 자세가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의 우정의 비결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진실로 종교계를 포함한 세계에 보내고자 하는 메시지이자,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이자, 영화 <두 교황>의 메시지이지 않을까?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