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유비에 대한 고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삼국지를 열 번 읽은 자와는 논쟁을 하지 마라.
삼국지라는 문학작품에서 보여주는 그 스케일과 기발한 지략 등은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해보면 열 번은커녕 한 번도 끝까지 집중해서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관우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 속에 삼국지는 관우가 전사하는 날로 끝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손권이 어떻고, 제갈량이 어떻고, 사마의가 어떻고 흥미가 안 생기더군요.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은하영웅전설의 영웅 양 웬리가 허무하게 사망했을 때와 비슷합니다. 이미 책은 구입해서 언제든 읽을 수 있지만,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 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넷플릭스를 보다가 한 드라마가 눈에 띄었습니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7032
2010년에 나온 95부작 중국 드라마 삼국지를 압축하여, 삼국지 극장판으로 공개한 것이었습니다. 총 8편이어서 이 정도는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편부터 틈틈이 예전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가끔 나무위키에서 찾아보면서 8편까지 다 보았습니다. 그나마 영상이라서 관우 전사 이후에도 참고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전편을 다 보고 나니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
유비는 과연 행복했을까요?
삼국지에서
유비는 정의롭고 명분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한 왕조의 정통 핏줄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천자를 구출해서 한 왕조를 다시 부흥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폭군 동탁부터, 간웅 조조까지 이 사명감을 거스르는 행동을 한 적이 없는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타고난 운빨의 사나이입니다. 삼국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무장인 관우와 장비를 도원결의라는 맹세로 완전히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누구나 인정하는 지략가 제갈량을 군사로 둔 어쩌면 사기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그뿐인가요? 조운, 마초, 황충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장수들도 유비에게 충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관도 완벽하고, 문관도 완벽하고, 심지어 조조 토벌을 해야 하는 대의명분까지 갖추고 있으니 누가 봐도 행복한 사나이이며, 삼국지의 진짜 주인공처럼 보입니다.
그에 비해 조조는 어떤가요?
환관의 자식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동탁 토벌 후, 위나라를 세운 인물이지만 천자를 구속하고 자기 맘대로 한다는 이미지로 공통의 적이었습니다. 뛰어난 문관, 무관이 많았지만 각각 일대일로 비교해보면 유비의 장수들에 비해서 약간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오를 치러갔다가 제갈량과 주유의 계략에 모든 병사를 잃고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며, - 네 맞습니다. 그 유명한 적벽대전입니다. - 그 후로는 침략에 맞서서 열심히 부국강병에 힘쓰다가 병으로 생을 마감한 군주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조조의 일생이 참 부질없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조조의 입장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삼국시대에서 가장 큰 세력인 위나라의 왕이었고, 개개인의 실력은 유비의 장수들보다 낮게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따르는 장수들이 많았습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장수 관우의 장례를 직접 치러주었으며, 자신의 뒤를 이을 뛰어난 자식들(조비, 조창, 조식, 조웅)도 있었습니다. 비록 삼국통일은 하지 못했지만 적벽에서 큰 패배를 한 것을 제외하면,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다 간 군주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유비로 돌아오겠습니다. 유비는 항상 조조 곁에 있는 천자를 구해서 한 왕조를 부흥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오나라를 공격하려는 생각을 한적이나 있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위나라 일편단심이었습니다.
근데, 어느 날 형주를 맡겼던 관우가 공을 세워야 한다며, 위의 허창을 공격하다가 생각도 안 했던 손권의 장수 여몽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결국 전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출진한 아우 장비도 허무하게 부하들에게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를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던 유비였는데, 도원결의한 두 아우의 죽음이 오나라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전군으로 오나라 토벌을 갑니다. 그 토벌 중에 이번에는 황충이 전사합니다. 유비는 촉의 유능한 대장군 관우, 장비, 황충, 마초, 조운을 오호대장군이라 칭하였는데, 무려 그중에 3명이 오나라 손권과 관련되어 전사한 것입니다. 항상 위나라 토벌만 생각하고, 전혀 관심도 없던 오나라한테 말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이 장면이 부각되어서 나옵니다. 손권을 잡아서 조상묘까지 전부 파헤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결론은 어떻습니까? 육손의 계략에 속아서 이릉대전에서 적벽대전에 버금가는 참패를 하고 손권의 얼굴도 못 보고 철수합니다. 큰 충격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오나라에서는 제갈근을 책사로 보내어 촉오동맹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이 장면에서 유비가 피를 토하는데, 진심 저 같아도 피를 토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병이 악화되어 수도로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데 자신의 뒤를 이을 자식이 유선이라는 것 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싶습니다. 오죽하면, 제갈량한테 꼭 들어주라면서 뒤를 이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심지어 유선에게 이제부터는 제갈량이 네 아비다라는 말을 하며 절을 시키고, 생을 마감합니다.
정리를 하자면, 평소 위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적에게 가장 소중한 아우 및 장수들을 잃고 복수는커녕 얼굴도 못 보고 대패하고, 곧 죽을 위기인데 뒤를 맡길만한 믿음직한 자식이 없다는 것 은 어떤 기분일까 싶습니다. 인간적으로 아 이런 결말이라면 차라리 군사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게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궁금해집니다.
유비는 정말 행복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