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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an 04. 2024

오토라 불리는 남자(A Man Called Otto)

연합감리교회(UMC) 한인공보부 웹사이트에 실린 글 입니다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고 또 자살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읽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You are not a complete idiot!” (너는 똥멍청이가 아니야!)


이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울음을 터트린 장면은.


바로 이 장면입니다


괴팍한 할아버지 오토가 옆집에 이사 온 엘살바도르 출신 이민자 마리솔에게 운전연습을 시켜주고 있습니다. 마리솔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이야기하는 상냥하고 쾌활한 사람입니다. 사랑스러운 두 딸의 엄마이고 지금은 셋째를 임신하고 있죠. 그녀는 영 운전실력이 없는데 오토가 고집해서 수동으로 운전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수동기어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신호에 걸렸습니다. 그녀가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자 뒤에서 사정없이 경적을 울려대고, 마리솔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합니다. 클락션을 울려대는 차에 화가 난 오토가 내려 뒤차 운전자의 멱살을 잡고 협박을 해 조용히 시키고, 마리솔은 결국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런 그녀에게 잔뜩을 인상을 찌푸린 채 오토가 하는 말입니다. 


“이제 내 말 잘 들어요. 당신은 먼 나라에서 여기 와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공부도 하고, 남편을 만나서 두 아이도 얻었어요. 이제 곧 셋이 될 거예요. 당신은 당신 가족도 잘 통솔하는 사람이잖아. 운전을 배울 수 있어요. 맙소사. 세상에는 운전할 줄 아는 똥멍청이로 가득 차 있는데 당신은 똥멍청이가 아니에요!”


너는 똥멍청이가 아니라는 말이 그렇게 울컥할 말인가요? 저는 그랬습니다, 거의 오열했으니까요. 욕 같은데 은근히 따뜻합니다. 오토의 말에 마리솔은 눈물을 닦고 차근히 기어를 넣고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움직여서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킵니다. 그렇게 그녀는 성공적으로 운전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도 수동으로요.


마리솔은 영화 초반에 마을에 가족과 함께 이사를 옵니다.  사교성 좋은 그녀는 남편 토미와 함께 오토의 집에 음식을 들고 인사 차 찾아옵니다. 오토가 퉁명스럽게 “내 이름은 오-로-(Otto, 한국어로는 ‘오토’지만 영어로는 ‘오-로-‘ 쯤으로 발음합니다) 요”하고 인사하자 마리솔은 크게 웃으며 “오또?”라고 남미식 억양으로 부릅니다. 그러자 오토는 화를 내며 “아니, 내 이름은 오-로-라고!”라고 말을 하자 마리솔은 당황하면서 “오또? 제가 뭘 잘못 발음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 앞에서 오토는 쾅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닫아버리지요. 


‘남의 일 같지 않구먼’


당황하는 마리솔의 얼굴에서 저는 영어로 목회하는 제 얼굴을 언뜻 본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오토 할아버지 한두 번 그러는 게 아닙니다. 마을 모든 이에게 소리를 질러대고, 윽박지르며, 꼰대처럼 굽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마리솔에게는 단어를 가르쳐주며 인상을 찌푸립니다. 상점에서는 30센트 때문에 매니저를 부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강아지 산책 후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강아지를 던져버리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웃입니다.


또한 오토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천장에 로프를 매 목을 메기도 하고, 배기가스를 차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기차역에서 뛰어내린다거나 장총을 목에 대기도 하죠. 그러나 번번이 이웃들의 방해로 자살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럼 그는 그날의 자살은 우선 미루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한심한 이웃들을 도와주며 또 하루를 보냅니다. 


오토는 강박적인 사람입니다. 사회생활에 익숙하지 않고, 사람관계의 미묘함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소냐는 달랐죠. 흑과 백 밖에 없던 오토의 세상을 아름다운 색채로 물들이던 빛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오토의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하던 그녀는 6개월 전 암으로 먼저 떠났고, 남은 오토는 흑과 백 밖에 남지 않은 세상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는 소냐의 부재를 이길 수가 없고, 그녀의 곁으로 가고 싶어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소냐는 젊은 시절 남편 오토와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에 휴가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됐습니다.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아이도 유산했습니다. 오토는 억울한 사고를 당한 아내를 위해 죽도록 싸우지만, 소냐는 싸우기 위해 살기를 포기한 것 같던 오토에게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이라며 싸우는 대신 살기를 선택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오토는 그때부터 소냐를 위해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그는 살 이유를 잃게 된 것이었습니다.


죽고 싶은 그의 삶에 시끄럽고 정 많은 마리솔이 들어오고, 마리솔과 함께 그녀의 가족, 이웃, 소냐의 학생 등 여러 사람이 태피스트리처럼 엮여들며 오토의 삶은 어느덧 서서히 색이 입혀집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소냐가 자신이 살기를 원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소냐의 말을 기억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소냐의 곁에 갈 때까지 마을의 이웃들과 새 가족을 이루며 행복하게 지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왕 돕는 거, 이제는 한심해하지 않고 진심으로 아끼고 생각하며 이웃들을 돕습니다. 이제 그의 주위는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합니다. 몇 해 후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안 그는 자연스레 죽음을 준비하면서 이제는 가족처럼 사랑하게 된 마리솔에게 유언장을 남기는데, 그 마지막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오또 할아버지(Abuelo Otto)”라고 읽습니다. 오-로-라고 읽지 않고요. 저는 그 부분에서 또 울어버렸습니다.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공지영 작가는 서문의 첫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죽어야 할 이유가 서른 가지도 넘는 사람이었다…”그러면서 그는 죽어야 할 이유를 생각하기보다 하루를 살 이유와 감사를 찾는데 더 애를 쓰면서 우울증을 극복하고, 어려움을 지나왔다고, 또 그렇게 지나는 중이라고 담담히 술회합니다.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소냐의 말은 우리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듯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주 ‘살아있’ 나요? 매일을 살면서도 죽음을 준비하는 오토처럼, 혹은 매일을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채워 나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그처럼, 삶에서 ‘죽음’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는 고통의 성금요일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살고 있나요.


오토는 아마도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삶의 등불 같던 존재를 잃었는데 우울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오토에게는 귀찮을 정도로 오지랖 넓은 마리솔과 그를 이해하는 오랜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오토는 우연찮게 마리솔이 두고 간 작은 용기에 담긴 음식을 먹어봅니다. 그리고는 맛있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음식을 한 입 한 입 삼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열왕기상 19:4-8)


엘리야 선지자도 죽고 싶어 할 때가 있었습니다. 죽기를 원하며 쓰러져 있는 그에게 천사는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내밀고 그를 어루만집니다. 

아니 ‘이왕 주실 거 시편 23편 말씀처럼 잔치를 베푸시고 머리에 기름도 발라 단장도 시켜주시지 그 힘든 사람에게 고작 딱딱한 구운 떡 한 덩이와 물이라니요?’ 싶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소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야 사십 야를 다시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릅니다.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시나요?


교회 이웃이 싸준 작은 용기에 담긴 김치 한 조각, 밥 한 술에 엘리야를 어루만지신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있지는 않을까요. 마치 마리솔이 싸준 엘살바도르 음식을 한 입 한 입 먹으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오또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작은 용기에 담긴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말씀하시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권사님이 어깨를 두드려줄 때, 그 손길을 통해 천사가 어루만지고 있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지날 ‘의지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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