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는 좋은 글이 많습니다. 사회초년생 보고서 작성 꿀팁이라던가, 싫어하는 직장 동료 유형-물론 저도 쓰긴 했지만, 퇴사하고 갓생살기 등과 같은 글들은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 글은 그런 도움이 되는 글보다는 "사회초년생"이 공기업에서 첫 보고서를 쓰면서 느낀 따분함, 그리고 가끔씩 마주하는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네요.
"누구를 위해 보고하시나요?"
보고서를 쓰다 보면 가장 많이 드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상당히 망설여집니다. 사실, 저는 보고서를 처음 쓸 때 "딱히 누군가에게 보고한다"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죠. 누군가가-보통 직장상사-가 시켰기 때문에 보고서를 씁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목표를 수립하고 배경과 시행계획을 짜면서 나에게 딱 감이 오는, 다른 사람도 납득이 갈 것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문장을 만들어 나갑니다. 여기에 어떤 배경이 담겨있어서 단어 선택을 주의해야 하고 예산은 어느 정도 들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도저히 생각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 보고서는 거의 대부분 반려당합니다. 붉은색 줄이 죽죽 그어지는 보고서를 보면서 이걸 다시 어떻게 고칠까, 내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한 걸까 고민합니다. 물론 대부분 부장님의 이야기처럼 방향이 틀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부장님의 의견, 즉 공감과 반발 뭐 각양각색의 절차들을 반영해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고쳐나갑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보고체계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겠네요. 구체적으로는 우리 부장님이 무슨 생각으로 반려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에이, 또 이거야?"
그렇게 첫 보고서의 참신한 표현들은 사라지고 "에이, 또 이거야?"라고 생각되는 선배의 보고서 틀을 사용하게 됩니다. 물론 보고서를 작성하는 나 자신도 지겨워지네요. 그래도 구멍이 숭숭 뚫렸던 글들이 그나마 번듯한 보고서로 결재가 돼서 사업 진행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문제없어 보이는 보고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어떤 보고서를 쓰든지 결국에는 다른 의견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이 문장은 너무 길어서 좀 더 간단히 줄이면 좋겠다,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요약해라라던가, 글에서 핵심이 뭔지 눈에 확 안 들어온다 라는 의견들입니다. 지시를 하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 보고서를 쓴 당사자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아니, 구체적인 방향도 제시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리면 보고서가 뚝딱 나오나 부루퉁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뭐든 상관없어, 결재권자에 입맛에 맞게 보고서 내용을 고치게 됩니다.
그렇게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제 시간만 의미 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같은 내용을 고치고, 또 고치고 비슷하게 고치기보다는 모른척하고 한번 더 여쭤보고 담당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좋겠네요. 그렇게 결재받은 글들은 결국 나름대로의 납득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내가 쓴 보고서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즐거움으로 남습니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물론 나 자신만 만족하면 뛰어난 보고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비교화-선배, 동료들의 보고서와 비교하는 작업- 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보고하기 전 최소한의 지지를 받는 것도 담당자로서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최종적으로는 "그래 이 정도면 됐다"라고 내가 쓴 보고서가 내 마음에 흡족할 만큼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입사 2년 차, 아직 새끼 감자에 불과하지만 후배들이 제 보고서를 찾아봅니다. 어떻게 보면 후배님들의 눈치를 보기 위해서라도 더 잘 써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보고서를 쓰자"라는 심플한 마음가짐은 도통 변한 게 없는 것 같네요. 부장님께서 상당히 난폭한 사고방식이니깐 바꿔라고 이야기하시겠지만 내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루퉁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참 건방지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발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저는 저를 위해서 보고서를 만듭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보고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