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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봉씨 Oct 04. 2021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어느 날의 기록

2020년 1월의 글.


버리는 건 어렵다.
매니큐어를 버리려고 분류하면서 굳이 손톱에 발라보다보니 어느새  내 손톱화려해져 있다.
옷 한 무더기 버리려고 수거함에 하나하나 넣다가 다시 한 두 벌 챙다.
원화를 버리려면 어느새 감상 모드에 빠지고,  연습장을 버릴 때조차 추억의 기록이 버려지는 것 아닐까 망설인다.
내게 필요 없는 책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챙기다 보면 그 사람에게 줘도 될까, 더 필요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몇 권 빼고,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며 집안의 여러 물건들이 빛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다시 귀퉁이에 놓인다.
미래 후회 방지 차원에서 차곡차곡 먼지만 먹인다.


머리로는 알면서 실행하는 건 왜 이리 어려운 건지. 미니멀리스트 채널을 구독하며 스스로 교화되기를 바란다.


어쩌면 지금 나의 집 크기는 내가 살기 쾌적한 크기가 아니라 짐을 놓기 쾌적한 크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집에서의 활동반경을 생각한다면  37미터제곱아 이 집도 괜찮은데, 예뻐 보이고 싶은 욕심에 이것저것 들여놓다 보니 지금 공간이 부족하다고 착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즘은 전에 비해 좀 더 과감하게 버리고 나누는 중이다. 아직은 아무리 버려도 티 나지 않는다. 속 안부터 자잘하게 쌓인 게 잔뜩이라 그렇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아이 옷과 안 쓰는 팩, 선크림, 머그컵, 각종 엽서와 스티커, 액세서리 등을,
친언니에겐 아끼는 얼굴 팩, 각종 화장품, 안마기, 가방, 옷 , 액세서리 등을 주거나 무기한 빌려주었다.
망설여지는 것들은 대부분 비싸게 주고 산 것들인데, 과거에 쓴 돈은 현재의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미련을 버릴 수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 이미 한차례 정리했던 옷과 물건을 또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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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년 10개월이 흐른 지금, 나는 변화했나?
변화했다. 완벽하지 않지만 생각과 삶의 변화는 확실히 있다.
다음 해에 갑작스럽게 이사를 결정하고 전셋집으로 옮기면서 대부분의 짐들을 팔았다. 100만 원어치는 되는 것 같다.
가방, 옷, 수납장, 책상, 다리미, 액자 심지어 발코니에 붙은 어닝까지! 짐이 줄어드니 이사비용도 축소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허술한 이삿짐센터를 만나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책상은 스크래치가 생겼고, 책장은 거꾸로 설치되었으며, 하얀 티브이 선반은 검게 때가 탔다. 심지어 빨래 바구니는 칼이 깊기 들어가 뚫려버렸다.
사람의 일이고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해야지. 뒤늦게 분개하고 싶지 않다.

아마 고양이와 작업실이 집에 있는 한, 내가 생각했던 미니멀한 집은 이루지 못할 것 같다.
바닥에는 매일 새 깃털과 고양이 터널이 늘어져있고, (캣타워는 왜 이리 큰 거야?) 작업실 책상은 늘 난장판이다.
원룸에서 가볍게 살고 싶었던 나의 꿈은 고양이가 뛰놀 공간이 부족할까 봐,
쉬는 공간과 일 하는 공간의 분리가 안 되면 정신적으로 피로할까 봐 대출을 받아가며 적당한 크기를 유지한다.  내 삶에 있어 필요한 건 남겨둬야 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환경에 관심이 더욱 많아지면서 미니멀리스트랍시고 무조건 버리며 비우는 행동가는 되고 싶지 않아 졌다.


미니멀리스트의 사전적 개념은 "필요 이상의 것을 완전히 억제하려는 사람. 최소한의 요소로 최대의 효과를 이루려는 사고방식" 이란다.

2020년의 글을 읽어보니 나는 버리는 데에 급급했던 것 같다. sns나 블로그를 보다 보면 미니멀하게 산다며 있는 물건 없는 물건 다 버리고 새로 인테리어까지 하며 말끔해진 집을 공개한다.
수납장을 새로 짜 어수선한 물건을 다 숨겨놓고 '저는 알고 보니 미니멀 라이프가 취향'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미니멀리스트의 의미는 계속 왜곡되고 있다.

나도 그런 이미지들에 속아 버리고 비워가며 내 집에 만족했다.
레스 웨이스트의 의미가 있는 미니멀리스트의 개념은 퇴색되고 있다.
 
현재 이사한 나의 집은 아주 미니멀하진 않다.
생각이 바뀐 지금은 짐을 늘리지 안되, 쉽게 버려질 물건들은 재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해보며 친환경에 근접하려고 한다. 사는 것보다 버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싶어졌다.
1년 10개월의 기간.
나는 미니멀리스트의 꿈에서 무해한 사람이 되는 꿈이 더해져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퇴보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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