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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Apr 03. 2023

#35. 잡히시다

마 26:47-56

[47절]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유다는 권력과 무력의 편에 서 있습니다. 예수를 팔자 그 악한 자들이 유다와 함께 하였습니다. 유다는 그들의 대장이라도 된 듯 지시하고 인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일이었습니다.

 유다 역시 “열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수께서 유다를 부르시고 유다와 함께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를 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기가 생각하는 구원의 방식을 의지했습니다. 자신의 판단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라고 달랐을까요? 베드로도 결국 칼을 꺼내 들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몽치가 있었다면 분명 휘둘렀을 것입니다. 평소 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전쟁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유다가 유별났던 게 아니었습니다. 모든 자들이 유다의 입장에서 유다처럼 예수를 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를 포함한 모두의 발을 씻으셨고, 유다를 포함한 모두에게 말씀을 가르치셨고, 유다를 포함한 모두의 죄인 됨을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하나”이오나 이 세상을 살면서 권력, 명성, 재물, 무력 같은 것들을 구원의 방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실 것이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지만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저는 또 예수를 팝니다. 그렇게 당신은 또 이 죄악을 위해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저는 가룟 유다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오 주여..


[51-54절]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도 권능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로마 정도는 손쉽게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군단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칼을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잡히시고 스스로 고난을 선택하심은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제가 가진 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칼을 제 뜻을 위해 휘두릅니다. 고작해야 귀 하나 떨어트릴 정도밖에 안되는데 말이죠. 마치 이것으로 예수님을 지킬 수 있고 내 뜻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것이 나를 망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면, 무엇을 가지든지 그것으로 망한다는 말씀이군요. 심지어 제 칼을 휘두름으로 성경이 이루어지는 일에 맞설 수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그거야 말로 망하는 길이죠. “칼을 휘두르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사는 길은, 오직 모든 가진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며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주여, 제 뜻을 내려놓길 원합니다. 그래서 제 뜻을 막아서는 훼방꾼들에게 시선을 두지 말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46)라고 나를 부르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56절]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 본문이 참 모순적이면서도 현실적입니다. 선지자들의 글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갑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순간에서 제자들은 도망쳐 버립니다. 자신의 기대와 뜻이 좌절되는 순간이었으니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가 품은 뜻이 같지 않음이 드러날 때 저 역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버리는 선택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여, 제가 당신을 버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든지 주와 함께하길 원합니다. 제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요! 이 특권을 날마다 누리며, 이 기적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주를 찬송하며 경배하게 하소서.

 말씀 앞에 주를 버리고 떠난 제자들이 속히 돌아오게 하소서. 주여, 저들을 구원하소서. 주님은 가룟 유다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유다의 발도 씻으셨습니다. 당신을 버리고 도망갈 모든 제자의 발을 차별 없이 씻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희생과 섬김의 사랑을 닮길 원합니다. 그 안에 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소서. 그들을 향한 주님의 애통한 마음을 제게 주소서. 예수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저들을 용서하고 변호하는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을 제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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