낀 세대로 살아가기
대한민국에서 낀 세대는 누구일까?
88학번인 필자는 낀 세대라 자부(?)하며 지금까지 살았다. 일제의 잔재인 '까까머리 깜장교복'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다. 중 2때부터 교복자율화가 시행되어 고교 졸업시까지 요즘 스타일의 교복은 한 번도 안 입어보고 사복만 입고 다녔다. 획일화된 패션에 개성시대가 펼쳐지며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에 물들어 갔다. 차를 고를 때 승차감보다 하차감을 더 따지듯 일명 '메이커'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다보니 운동화와 청바지 브랜드의 탄생과 몰락의 변천사를 훤히 꿰고 있다. 또한 82~87학번까지 선시험 후지원, 즉 학력고사를 먼저 본 후 점수에 맞춰 대학을 지원했던 일견 공정과 상식이 통하던 대입제도가 88년부터 선지원 후시험으로 바뀌었다. 상향지원(소신지원?) 후 평소 실력보다 당일 점수가 높게 나오면 로또, 아니 주택복권을 맞은 기분이었던 반면, 안전지원을 해서 합격을 하더라도 당일 성적이 잘 나오면 왠지 손해본 것 같은 느낌으로 학기초를 보내곤 했다. 인생에서 소위 '줄서기', '쎄뽁'의 중요성을 학창시절부터 체득하게 된거다. 고3이라 공부에만 전념하던 87년, 마지막 독재자 전두환이 직선제 대통령으로 교체되며 민주화 운동의 열매는 87학번 이전 세대의 전유물일 뿐, 88인 우린 환골탈태한 세상에 무임승차한 그저 해맑고 의식 없는 올림픽 꿈나무거나 오렌지족일 뿐이었다.
대학교 1학년때 문무대, 2학년때 전방교육이란 학생군사훈련을 1주일 정도씩 다녀오면 30개월이던 군생활이 27개월로 단축되었는데 88년도를 끝으로 사라지며 45일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대학만 나오면 누구나 취업이 가능한 풍요롭던 시절이라 공부보다 대학생활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지만 사회진출 후 IMF 환란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갔다. 그럼에도 아날로그의 감성과 디지털의 편리함을 두루 체험한 어찌보면 나름 축복받은 세대기도 하다.
학력고사가 수능으로 바뀌며 수험공부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도 모자라 97년말 터진 미증유의 경제위기로 사회진출 자체에 어려움을 겪은 94~95 학번들이야말로 자기들이 진정한 낀 세대라 말한다. 인구폭발로 태어날 때부터 시루 속 콩나물처럼 자라며 치열한 고입시험까지 거쳤던 58개띠들도, 이후 뺑뺑이(추첨으로 고등학교가 배정되던 고교평준화 제도)가 불러 온 해방감을 만끽한 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예비고사 세대들도 다들 본인들이 낀 세대라 주장한다. MZ세대 중에 진정한 낀세대는 98년생들이다. IMF 이후에 출생하며 이전 세대들보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결핍을 느끼며 자랐고, 초등학교땐 신종플루로 고1때에 터진 세월호 사건으로 수학여행이란 걸 가보지 못한 세대다. 대학시절엔 펜데믹으로 비대면이 일상화 되며 사회화에 애를 먹은 진정한 낀 세대라 아니할 수 없다.
낀 세대엔 이처럼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앞 세대가 누렸던 혜택이 내 앞에서 단절되거나 역사가 되어버린 과거의 잔재들을 마지막으로 현실에서 경험해 봐야 낀 세대에 낄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세대들도 하나같이 본인들도 낀 세대라 얘기한다. 왜 그럴까?
모두가 낀 세대인 대~한민국
낀 세대는 변화를 전제하고 있는 단어다. 어떤 사건에 끼어 있으려면 상반된 두 개의 사건이 나뉘는 경계에 서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또래들의 역사를 옆에서 가장 관심있게 지켜봤고, 크건 작건 본인 세대에 일어난 변화의 마디를 직접 통과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기에 누구든지 자신들은 낀 세대라 여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반도국가인데 그 반도조차 반으로 갈라져 있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그 자체로 변화무쌍한 일들이 발생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 대한민국에선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났고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사회적 제도와 규칙 등이 조변석개했다. 다이내믹 코리아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낀 세대가 많이 살고 있는 나라다.
그림자엔 빛이 있는 법. 낀 세대엔 남들이 갖지 못한 본능적인 생존능력이 자연스럽게 축적된다. 영원한 것은 없단 걸 알기에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하는 유연함이 있으며, 변화를 예상하고 대비하며 신속하게 적응한다. 이런 국민성이 한강의 기적과 한류를 만들어 냈고 나라에 위기가 생기면 결국 그것을 극복해 내는 저력을 키웠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입으론 계속 불평을 늘어 놓겠지만... 한 마디로 눈높이가 높고 만족을 모른다고 할까?
50이 넘도록 이것 저것 재다 혼기도 놓쳐 버렸고, 육지와 섬 중간 어디쯤 경계에서 살아가는 내 인생 자체가 대한민국 낀 세대의 모습을 쏙 빼닮은 듯 하다. 주식과 코인은 반토막이 난지 오래고 2023년엔 본격적인 경기침체가 온다는 뉴스가 곳곳에서 들린다. 또 하나의 역대급 낀 세대가 만들어질 완벽한 조건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나라 꼴이 답답해 걱정이 앞서지만 결국 모두가 낀 세대일 수 밖에 없는 한국인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또 다른 승자의 역사를 만들어 낼거라 확신한다. 그저 투덜거릴 뿐!
펜데믹으로 대한민국의 경계를 넘어본지도 5년이나 지났고, 제주 생활한지도 벌써 10년이 되어 간다. 해외여행길이 열리고 비수기가 시작되다 보니 제주 숙박업계도 고난의 행군에 들어갔다 . 2023년 계묘년, 정유일주인 내겐 변화의 진폭이 가장 큰 해일거란 걸 오래 전부터 직감했는데 전세계는 물론 나를 둘러싼 세상도 내게 변화할 때가 됐다는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간만에 유럽여행 티켓은 질렀고 인생 3막 실행에도 박차를 가해보련다.
'낀 세대'를 넘어 '깬 세대'로, 가자 Vamos!